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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기만 하면 "올 임 단협 투쟁" 할수 밖에 없어...
작성자 S&T중공업지회
댓글 0건 조회 2,268회 작성일 2007-11-09

본문


‘중앙교섭.지부 집단교섭’
  참여는 노사관계 안정의 “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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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회사는 노조의 중앙교섭과 지부 집단교섭참여를 계속 거부해왔습니다. 해마다 중앙교섭에서 노사합의된 ‘안’에 대해 아예 적용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지회가 중앙교섭 관련한 투쟁을 하면 “불법”과 노조를 외부단체로 매도 해 왔습니다. 회사가 중앙교섭과 지부집단교섭에 계속적으로 불참하는 것은 불법이며, 단체교섭회피 인 것입니다.

‘“저임금 정책은 회사
발전에도 도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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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금으로는 생활 할 수 없는 현실을 회사가 계속외면하면 회사의 장기적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으라고 일 해도 아이들 학비에 해마다 오르는 물가를 따라 가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느 누가 회사를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말로는 안정된 노사관계를 외치며, 속으로는 “저임금 정책과 사원복지”를 외면한 회사 정책이 노사관계불안을 불러오고 회사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color=#0000fff>
지난 23차 본 교섭에서 회사의 실무교섭 제의를 교섭위원들은 고뇌 끝에 실무 교섭에 대해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07년 임, 단협을 대화로 풀기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교섭 자리에서 회사의 변화된 태도를 기대 한다고 했습니다.
회사도 올 임,단협을 빠른 시일 내에 대화로 풀기위해 실무를 하자고 주장했던 만큼 도토리 키 재기 실무방식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우리는 올 임, 단협을 마무리하기위해  투쟁하겠다는 각오가 담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결할 때 회사의 태도는 변할 것이며, 우리요구를 수용할 것입니다./color=#0000ff>
지회는 대화로 임, 단협을 마무리 하고자 하겠지만 회사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는 절대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의 “변화된 태도”가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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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도 현장 조합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23차 교섭에서 회사측 최종성 교섭대표는 ‘회장님 말씀’이라며 사원들이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는 나이라며 걱정한다고 했습니다.
말로 하는 걱정이 아닌 진심으로 사원들의 아픈 곳을 어루 만져주는 실천을 다시한번 기대 합니다.

“이랜드 홈 에버” 비정규직 “투쟁기금” 모금키로…
=생계비 지원 끊긴 이랜드-뉴코아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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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중인 비정규직들의 애절한 하소연/color=#000099>

"사실 우리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노조 활동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살게 해달라고 하는 건데 도대체 우리나라에 헌법이 왜 있는지 노동3권은 또 왜 있는지 억울한 마음은 어디에다 이야기할 수 없다."(이랜드 비정규직 조합원)

홈 에버 김 아무개(45)씨 계약해지 당하지 않으려고 파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투쟁하려고 퇴직금 받기위해 회사측에 해고를 요청할 판…
뉴코아아울렛에서 비정규직 계산원으로 근무해온 정아무개(47)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계약해지 당하는 게 억울해 파업에 나섰지만, 지금은 해고돼 퇴직금 받은 돈으로 투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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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SIZE: 9pt" face=신명조color=666666>

조금형편이 낳은 우리가 나서야/color=#0000ff>
근기법을 지키라며 근기법 책과 함께 분신 산화해 가신 “전태일 열사의 37주기 되는 해“ 강산이 세 번 바뀐 세월이지만 아직도 노동자들의 현실은 37년 전이나 똑 같습니다.
노조에서는 지난 8월에 이랜드와 홈에버 비정규직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엄호하기위해 간부는 1만원 조합원은 3000원씩 투쟁기금을 마련하기위한 결의를 하고, 이미 타 지회는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이에 지회는 8일 확대간부회의에 보고하였고 다음 회의에서 구체적 논의를 한 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노동자 농민 투쟁!/color=#ff3300> style="FONT-SIZE:15pt">
치열했던 원산 노동자 총파업/color=#0000ff>

일제강점기 가장 심하게 탄압받고 수탈당한 계층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3.1 반일시위운동과 더불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권익을 보호하고 민족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게 되었다.
  겸이포 제철소에서는 3월 3일 2백여명의 노동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에 나섰으며, 250여명의 노동자가 두 번째로 시위를 하여 용
광로를 점거하면서 일본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성전기주식회사 종업원 5백여 명은 2일간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에 참여하고, 전차운전사와 차장을 비롯한 전체 종업원이 파업을 단행하여 서울이 한때 암흑천지가 되었다.

동아연초주식회사 종업원 5백여명은  만세를 불렀고 두번째로 6일간 파업을 단행했다.
원산 노동자 총파업과 일본경찰의 가혹한 탄압은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투쟁으로 기록된다.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전개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 노동조합원 2천 200여명의 파업했다.
  그러자 1929년초 원산 운수회사 자본들이 일본인 자본가들의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에서 중국인 및 한국인 노동자를 모집하여 오는 등 노동자에 대한 탄압정책을 가중시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나섰다. 원산두량노동조합, 해륙노동조합, 운반노동조합 등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체노동자 2천 200여명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원산총파업은 지도부에 의해 자금난, 식량난, 특히 일본경찰의 무지비한 폭력적인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총파업에 대한 전국 각지로부터의 열렬한 성원은 노동운동사에서 뿐만 아니라 반일(反日) 민족해방운동사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뒤 1930년 1월 10일에 일어난 부산조선방직 파업이 있었으나 일본인 사업주와 경찰의 철저한 탄압으로 10일만에 실패하였다.
원산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이던 이 투쟁은 부산방직 2천 3백여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파업이 시작되자 회사 측은 남녀 노동자 1000여명을 합숙소에 감금하는 한편, 통근 노동자와의 연락을 끊기 위해 정사복 경찰과 무장 헌병을 공장 주변에 배치시켰다.
감금된 남녀직공들이 탈출을 시도하자 소방차를 동원해서 물세례를 퍼부으면서 대량해고와 대량검거로 파업을 분열시켰다.
원산과 부산 등지의 노동자 파업이 대규모로 전개되고 국민의 지원이 뒤따르게 되자 일본은 노동쟁의 및 파업은 물론 노동단체의 결사 자체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1924년 북성회 계열이 조직한 조선노동총동맹은 창립대회 도중에 집회금지령이 내려졌고, 이후 일체의 집회가 허가되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민중들의 투쟁으로 역사는 개혁되어 왔으며, 역사의 변혁을 이루는 주체 세력 인 것 입니다.
더 이상 소수 독점 기득권 지배 세력들의 민중에 대한 탄압을 더 이상 방관 할 수 없습니다.
11일 백만 민중대회가 그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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