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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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자본, 천민자본 규탄집회 및 화영식
작성자 지부
댓글 0건 조회 3,577회 작성일 200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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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6일(17:30) 금속노동자 경남투쟁본부 주최로 통일 악질자본, 천민자본 최평규, 박재석 규탄 대회와 화영식을 개최하였다.
이날 집회에는 거제의 대우조선조선 동지들을 비롯하여 지역의 금속과 파업투쟁중인 국제호텔 동지들과 악랄한 탄압을 뚫고 집회에 참석한 통일 지회동지들과 함께 전체대오 1000여명의 동지들이 함께하였다.

이날 지부장(허재우)동지는 3월16일 지부 임대에서 통일관련한 총파업 결의를 만장 일치로 결의하였으며 투쟁일정은  지부운영위원회에 위임받아 처리하기로 하였다며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노동자 다 죽이는 천민자본 악질자본 최평규를 타도하기하기위한 지부 총 파업투쟁 일정을 잡을것이라 했다




집회 마지막에 해고된 통일지회 부녀 조합원의 그동안의 삶과 투쟁의지를 밝힌 글을 싣고자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회사의 부당해고에 의해 생각지도 않은 해고자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18년전 두돌이 채 안된 아들 녀석과 다섯살 된 딸아이를 시골에 맡겨 둔 채 28살이라는 나이로 지난 87년 통일에 입사하여, 20년 가까이 식당 일을 하며 사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며 직장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아이들을 시골에 맡겨 놓고 엄마를 애타게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뼈가 바스러지게 일을 했고, 하루종일 물 속에서 일을 하다 뚱뚱 부은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보이지 않은 아이들이 생각나 가슴이 아파 아이들을 데려 오려고 시골에 갔는데, 너무 어린 아들 녀석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러한 동생을 엄마에게 데리고 오려고 딸아이는 엄마가 왔다면서 동생의 손을 잡고 나에게 왔지만, 다시 할머니 뒤에 숨는 아들 녀석을 보면서 눈물을 한없이 흘렸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들을 데리고 와서 남편과 함께 야근을 하는 날엔 아무도 없는 집에 어린애들 둘만 놔두고 3일에 한번씩 하는 야근을 해야 했으며, 아침 8시 출근하여 그 날 밤 야근하고 그 이튿날 퇴근하여 집에 가보면 엄마를 기다리다 못해 지친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방바닥에 붙인 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지쳐 있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그 많은 세월이 지금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식당에서 같이 근무했던 저와 아주 친했던 친구가 출근할 때마다 울면서 오는데, 아이들이 "맛있는 것 사 달라고 안 할게, 야구르트 사 달라고 안 할게"하면서 자기를 잡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던 그 친구는 "통일 식당이 너무 힘들다"며 작은 공장 식당으로 옮겨간 후 그 곳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들의 처지가 너무나 슬퍼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때는 회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입학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 주지 못했고, 소풍에 함께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러한 애들이 흘러가는 세월에 따라 이젠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하나는 서울에서 하나는 대구에서 엄마, 아빠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저와 같은 통일중공업에 다니는 남편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하며 학비를 대려고 하였지만, 통일중공업의 작은 월급으로는 우리 부부 둘이 아무리 벌어도 애들의 학비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학비를 댈 수가 없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자기들 스스로 휴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기들 학비를 보충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작은 행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껏 많은 슬픔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떻든 간에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온 그저 소박한 삶이었지만 더 이상도 바라지 않고 만족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주 작고 소박한 저의 소망과 행복이 이번에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2년전 8월 어느 날, 직영이었던 식당을 갑자기 외주로 전환하고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꼬드겨 외주 업체 직원으로 전환시키고 우리의 일터를 지키려는 부녀 조합원 2명을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이런 회사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회사는 우리들을 작년 4월에 일방적으로 250명 휴가자 명단에 우리를 집어넣어 일터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여름에는 식당 안의 온도가 50도에 육박하는 환경에 흐르는 땀으로 인해 체중이 3-4키로가 빠졌고 허벅지 안쪽은 흘린 땀에 살이 짓물려 쓰리고 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하루에도 서너 차례 흘리는 땀으로 인해 속옷을 갈아입어야 했으며, 어떨 때는 너무 땀을 많이 흘리다 보니 탈수로 인해 찬물에 몸을 담가야 진정이 되었고,

  허리가 아파 치료를 받아야 한다니까 디스크는 체질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디스크 판정을 받으면 회사를 그만 둬야 된다는 담당 관리자의 말에 그 누구든지 팔목이나 어깨가 내려앉는 통증을 느껴도 회사에 말 한마디 못하고 일을 해야 했고 그 것이 당시 당해야 했던 비정규직의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통일중공업에서 회사에 의해 비정규직의 슬픔도 당해 봤고 정규직의 기쁨도 맛봤습니다.

  그런데 복귀를 하려 하니까 회사는 우리가 일했던 식당이 아닌 주물공장으로  부당인사를 보내는 부당한 처사를 하였습니다.

  근 20년 동안 오로지 식당 일만 해 왔던 저에게, 주물공장 현장에서 계단과 화장실 등을 청소를 하라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보직변경에 주물공장 이라니요.  왜 입니까?

  온몸이 부서져라 일만 한 것이 저들의 눈에 잘못으로 보였다면, 과연 그들의 눈은 명태, 동태눈쯤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다 저는 결국 89명의 조합원과 함께 부당해고 된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 투쟁사를 하라고 하지만, 저는 투쟁이라는 단어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보기는 많이 보았습니다.

  남편이 입고 있는 조끼 등짝에서 보았고, 남편의 이마에 두른 붉은 띠에서 투쟁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뿐입니다.

  어느해 이맘때쯤 남편이 노동조합 활동 중 머리를 삭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투쟁이라는 단어도 모르는 저의 가슴에 무엇인지 모를 가슴 뭉클함에 하루종일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노동조합 간부를 하면서 임단투때 집에 두세달씩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이들이 "왜 아빠는 집에 오지 않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애들이 물어 본다면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투쟁 조끼를 입어야 하고, 머리띠를 둘러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 남편이 왜 몇 달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투쟁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왜 삭발을 해야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저도 해고되었지만  남편도 최평규에게 부당해고를 당하여 졸지에 부부가 해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제 남편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가슴으로 흐르는 눈물을 제 모습과 함께 카메라에 담고 있을지 모릅니다.

  남편은 노동조합 간부이다 보니 현장에 조합원을 만나다 관리직들이 시비를 걸고 이를 가지고 회사는 도리어 남편을 부당해고 시켜, 졸지에 우리 부부는 해고자 부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20년 동안 힘겨웠지만 오직 가정의 행복을 위한 아주 작고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 부부가 지금까지 통일중공업을 기반으로 작은 소망을 키워 왔는데, 어찌 이렇게 하루아침에 우리 가정의 작은 소망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며칠 전 마침 집에 있던 딸아이가 엄마, 아빠가 해고된 사실을 알고 "엄마 나 학교 그만두고 돈벌러 가야 된 것 아니야"하는 소리가 엄마인 내 가슴에, 20년 동안 엄마의 사랑을 먹고살아야 했던 아이들이 사랑이 아닌 눈물의 맛을 보게 했던 그 가슴아팠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슬픔이 복받쳐 왔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들이, 내 개인적인 이야기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과 특히 우리 해고된 조합원들의 공통된 슬픈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많은 노동자들이 저와 같은 슬픈 고통을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며 외쳐야 할 수밖에 없고, 이 싸움을 기필코 이겨서 저와 같은 슬픈 고통이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래가 아니라 끈끈하게 뭉쳐진 진흙이 되어야 합니다.  모래가 되면 흩어지게 되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진흙이 뜨거운 불에 돌덩이보다 더 단단해 지듯이, 회사의 탄압이 크면 클수록 우리들은 더욱 단단해 질 것입니다.

  악질 자본 최평규와 노동자를 팔아먹은 성경에 나온 유다와 같은 박재석에게 이대로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
결코 우리는 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질 자본 최평규와 유다 박재석은 고작 돈 몇 푼 가지고 행세하지만. 우리에게는 여기 계신 노동 형제들이 있고, 전국의 수많은 노동 형제들이 있기에 결코 질래야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기필코 이 투쟁 승리하여 저와 저의 남편이 가꾸어 왔던 조그맣고 소박한 행복을 다시 되찾고,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도록 할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지역 동지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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