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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에서 시작된 부의 상속은 원천부터 잘못된 것”
두산그룹의 모태는 1898년경에 설립된 박승직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승직은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중 경제분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자본과 결탁하여 자국민의 이익을 억압하는 매판상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박승직은 경성 상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05년 당시 조선 상인들은 일본의 면제품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몰락하고 있었다. 포목상인들은 창신사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지만 일본 측 상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결국 해체되고 만 것이다. 당시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의 자본을 끌어들였다.
공익사를 설립하여 활동할 즈음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제일은행의 일본인 지점장으로 하여금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 사이 박승직의 인지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부터 매판자본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데 이것이 박승직으로 하여금 ‘일조협력기업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얻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 2009년 2월 24일 일요서울 기사 발췌 -
1945년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정확한 청산이 이뤄지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처럼 식민지시기 부역자들에 대한 정확한 처벌이 있었다면, 지금의 ‘두산그룹"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알짜배기 중견기업 삼키고, 고작 한다는게 단협해지?
두산자본은 08년 3월 유압기계부품 점유율 38%의 알짜배기 동명모트롤(옛 동명중공업) 주식 53%를 인수했습니다. 인수 한달여만에 몇 년동안 노동조합과의 합의로 가입해있던 금속산업사용자협의회를 탈퇴했습니다. 2008년 6월 두산모트롤로 사명을 변경하고, 경영을 시작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2008년 10월 15일 일방적인 단체협약 해지 통보를 했습니다. 2009년 4월 16일자로 단체협약이 해지됐습니다.
20년간 중견기업이 유지해왔던 단체협약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단체협약 때문에 경영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07년, 08년 상당한 흑자가 발생했습니다. 노동조합에서 08년 임금인상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자 회사는 ‘임금동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원들은 올 초 수천만원 가량의 성과금을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부끄러워서인가?
동명모트롤지회(08년 임단협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지회명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합원들과 금속노조 경남지부 소속 간부 등 250여명이 4월 25일 서울 종로4가에 있는 ‘두산그룹 발상지’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서울까지 장시간 버스를 이용해 올라갔는데, 그나마 비가 내려 어려운 집회였습니다.
집회장 바로 옆에 ‘두산그룹 발상지’가 있는데, 집회 하루전에 벽을 만들어 놨더군요. 부끄러워서인지, 무식함을 보여주는 것인지?
집회장 옆으로 보이는 흰 벽이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다음 검색창에서 "두산그룹 발상지"를 쳐 보시면 원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집회가 끝날때까지 비가 왔습니다. 민중가수 김성만씨가 비를 맞으며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주변에 있는 연강아트홀 (‘연강’은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의 호라고 하네요) 앞에서 두산그룹의 천박함과 반노동자적인 모습을 알려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행진을 해서 동대문 옆 두산타워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하고, 매판자본으로부터 출발한 두산그룹의 모습을 규탄하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집회를 마쳤습니다.
친일매판자본으로 지금까지 떵떵거리고 있는 기업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http://cafe.daum.net/kokoin 에 가 보시면 됩니다.
(기사 가 늦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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