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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라도 따뜻하게> 표성배 시집 소개합니다
작성자 객토문학
댓글 0건 조회 2,070회 작성일 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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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성배 시집 / 기계라도 따뜻하게 / 문학의전당 / 2013

 


1995년 제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표성배의 시집. 총 4부로 구성한 이번 시집은 "그의 시적 인식은 노동의 “유효기간”을 명령하는 자본의 보편적 시계를 겨냥하고 있으며 동시에 삶의 구체적 토대와도 결코 의절하지 않았다. 당분간 이 사이에서 떨림이 지속될 수도 있겠으나, 그 떨림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지의 시간을 향한 설렘 때문일 것이다. " 라는 황규관 시인의 말처럼 자본에 의해 구획된 시간과 개별 생명체가 어쩌지 못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중층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 : 표성배

1966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찬 날』 등이 있다.


시인의 말

제1부

봄날이었다
봄비
어쩌지 못한다
노란손수건
좋은데이
겨울 숲을 깨우는 비
기계라도 따뜻하게
춘분
사이
일요일 한낮
기계의 숲
두 시 사십오 분
이명(耳鳴)
대장정
에밀레종

제2부

그늘
출가
소나기
여우비
갈대
기계로부터
하룻밤 사이
미안합니다
철공소
저녁노을 앞에서
1000일
문자메시지
바라보기
낙화
유효기간

제3부

천 개의 마음
뜬금없이
막장
컨베이어
하지(夏至)
일렬세계
얼굴
바이트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관절
노선
쇳소리
정직한 일
자리
목련꽃이 위험하다
그리고, 2012년입니다

제4부

자정에
수레바퀴
항구
장마 그리고 장마
사이에
고철 장에서
밥과 망치
한낮 야외작업장에서의 안부
따뜻하다
그해 여름
사슬
실체
빈둥거리다
CCTV
외로운 시

해설 실재의수사―장성규(문학평론가)


시적 언어를 통해 우리가 먹는 “밥”은 노동력의 교환가치로의 전환을 통해 비로소 획득 가능한 “피”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증언될 수 있다. “밥은 피”라는 실재는 ‘밥’과 ‘피’ 사이에 놓인 모종의 공통성을 통해 은유의 수사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일상에서 접하는 ‘밥’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피’의 형식을 빌려 재현된다. 이러한 수사는 실재의 본질을 인식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마술”과도 같다. “마술”과도 같은 수사는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실재의 모순을 명징한 언어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표성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마술”을 경유하지 않은 채 곧바로 “밥”이라는 실재에 육박하고자 한다. 교환가치에 대한 인식 이전에, “밥 한 숟가락이/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획득되는 실재의 수사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땀방울”을 통해 “노동”을 인식하기 이전에, “망치에 손가락이 깨져”본 실재의 체험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수사이다. “깨진 손가락에서 밥알이 튀어나”온다는 진술은 실재와 언어, 수사 간의 간극 자체를 붕괴시킨다. 이미 어떠한 수사보다도 현실의 삶이 더욱 강력하게 실재와의 대면을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간극을 전제로 한 시적 언어와 수사가 낄 틈이 없는 것은 필연적이다.

아래의 시에서 실재의 수사는 단순히 실재의 본질을 환기시키거나, 혹은 기표의 자율적 의미를 재인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시, 망치를 들게 만”드는, 그리하여 다시 실재와 대면하도록 강요하는 노동의 일환이다. “밥은 피라는 은유”는 실재의 수사를 통해 언어와 시의 층위를 넘어, 노동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니 표성배는 시인이자 노동자인 것이 아니라, 곧 시인=노동자라는 진술이 가능할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쌀을 만들고/엄마가 밥을 짓는 것이 마술인 줄 알았다

밥은 피라는 은유적 해석이/내 마음을 사로잡던 한때
실재(實在)와 마술 사이는/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밥 한 숟가락이/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밥은 마술이 아니라/실재라는 것을 몸으로 알고부터
내 은유적 해석은 점점 빛났다

근육이 팽팽해지는/땀방울에 대한 시적 의미를
망치 한 번 내려치면서 부정했다면
나는 진짜 노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가 마술이 아니라/실재라는 것은
망치에 손가...시적 언어를 통해 우리가 먹는 “밥”은 노동력의 교환가치로의 전환을 통해 비로소 획득 가능한 “피”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증언될 수 있다. “밥은 피”라는 실재는 ‘밥’과 ‘피’ 사이에 놓인 모종의 공통성을 통해 은유의 수사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일상에서 접하는 ‘밥’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피’의 형식을 빌려 재현된다. 이러한 수사는 실재의 본질을 인식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마술”과도 같다. “마술”과도 같은 수사는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실재의 모순을 명징한 언어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표성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마술”을 경유하지 않은 채 곧바로 “밥”이라는 실재에 육박하고자 한다. 교환가치에 대한 인식 이전에, “밥 한 숟가락이/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획득되는 실재의 수사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땀방울”을 통해 “노동”을 인식하기 이전에, “망치에 손가락이 깨져”본 실재의 체험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수사이다. “깨진 손가락에서 밥알이 튀어나”온다는 진술은 실재와 언어, 수사 간의 간극 자체를 붕괴시킨다. 이미 어떠한 수사보다도 현실의 삶이 더욱 강력하게 실재와의 대면을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간극을 전제로 한 시적 언어와 수사가 낄 틈이 없는 것은 필연적이다.

아래의 시에서 실재의 수사는 단순히 실재의 본질을 환기시키거나, 혹은 기표의 자율적 의미를 재인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시, 망치를 들게 만”드는, 그리하여 다시 실재와 대면하도록 강요하는 노동의 일환이다. “밥은 피라는 은유”는 실재의 수사를 통해 언어와 시의 층위를 넘어, 노동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니 표성배는 시인이자 노동자인 것이 아니라, 곧 시인=노동자라는 진술이 가능할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쌀을 만들고/엄마가 밥을 짓는 것이 마술인 줄 알았다

밥은 피라는 은유적 해석이/내 마음을 사로잡던 한때
실재(實在)와 마술 사이는/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밥 한 숟가락이/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밥은 마술이 아니라/실재라는 것을 몸으로 알고부터
내 은유적 해석은 점점 빛났다

근육이 팽팽해지는/땀방울에 대한 시적 의미를
망치 한 번 내려치면서 부정했다면
나는 진짜 노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가 마술이 아니라/실재라는 것은
망치에 손가락이 깨져보면 안다
깨진 손가락에서 밥알이 튀어나오고
가족들의 아침이 얼마나 우울한지

그러나, 실재가 된 망치를/가만히 쓰다듬어보라
밥은 피라는 은유적 해석이
또, 다시, 망치를 들게 만든다는 것을/알 수 있을지 모르니
―「밥과 망치」 전문

따라서 굳이 노동을 다룬 시를 “노동시”라고 명명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나 “자연”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실재인 것처럼, “노동” 역시 별다른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 수행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고립된 무언가로 추상화시켜 두 겹의 간극을 반복재생산하는 인식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노동시”가 별다른 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자체로 “뜨겁게 살아 요동”치는 삶의 발화 형식임을 인식하는 그에게, 실재의 수사는 필연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수사들이 시적 대상과 주체간의 간극을 전제로 하는 것에 반해, 적어도 그에게 노동을 둘러싼 대상과 주체와의 간극은 이미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실재의 수사를 통해 자신의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바로 노동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기계’의 발화는 주목된다. 


표성배의 시에 어떤 변화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시절 탓이 아닐 것이다. 지금껏 공장 혹은 기계는 시인의 확장된 감각기관에 다름 아니었다. 예전부터 이런 기이한 일에 놀라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시인의 구체적 경험을 밑바탕으로 하기에 진실의 ‘경지’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시인의 기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기다리던 비가 내려도/꿈쩍하지 않는 기계” 앞에서 시인은 “시간”을 경험하거니와 이번 시집에서는 자본에 의해 구획된 시간과 개별 생명체가 어쩌지 못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중층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느낌이 맞다면 지금 시인은 어떤 분기점에 와 있는 게 분명하다. 과연 그의 시적 인식은 노동의 “유효기간”을 명령하는 자본의 보편적 시계를 겨냥하고 있으며 동시에 삶의 구체적 토대와도 결코 의절하지 않았다. 당분간 이 사이에서 떨림이 지속될 수도 있겠으나, 그 떨림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지의 시간을 향한 설렘 때문일 것이다. - 황규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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