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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기증된 기타의 "진실"을 아시나요(오마이뉴스)
작성자 콜트빨간모자
댓글 0건 조회 2,780회 작성일 20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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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기증된 기타의 "진실"을 아시나요
한국 음악인들에게 "콜텍 문화재단"을 묻다
11.03.21 16:23 ㅣ최종 업데이트 11.03.21 16:23  송경동 (umokin)

며칠 전 우연히 참 가슴 따뜻한 소식 하나를 봤다. ""세시봉" 시대를 이끌어간 가수 이장희가 강근식, 조원익 등 40여 년 전에 결성한 밴드 "동방의 빛" 멤버들과 뭉쳐 울릉도의 한 초등학교에 기타를 증정하는 뜻깊은 행사를 갖는다"는 기사였다.

울릉도의 자연이 좋아 정착한 이장희씨와 조원익씨가 섬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쳐 왔는데, 기타가 부족해 마침 "콜텍 문화재단" 이사로 있는 옛 동료 강근식씨를 통해 25대 가량의 기타를 기증받았다는 것이다. 노래 인생 40년이 지나 외딴 섬소년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는 이들의 사연은 한국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는 듯 뭉클하기도 했다.

시를 쓰는 나는 그들처럼 인생의 황혼이 질 무렵이면 어느 곳에 서 있을까. 꿈처럼 어느 시장 모퉁이에서 아기자기한 재활용 고물들로 이루어진 좌판을 열고 따뜻한 봄날 햇볕을 쬐며 아름다운 시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좋겠다. 눈이 초롱초롱하니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작은 아이가 신기해하는 고물이 있으면 "네가 우리의 미래란다"하는 마음으로 그냥 하나 건네주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상념도 잠깐. 난 끓어오르는 어떤 비애와 소태를 씹은 듯한 불쾌감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그들 곁에 따라붙은 "콜텍 문화재단"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내가 왜 그럴까 궁금한 분들은 바로 이 기사를 접고 "콜트콜텍"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된다. 그러면 거기에 "콜텍 문화재단"과 관련한 수많은 기사들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이다. 가령 이런 내용이다.

"엄청 시끄럽고 분진 가루도 뿌옇게 날려요. 천식에, 난청에 더구나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니 다리가 퉁퉁 붓고…. 기타 몸체를 다듬는 기계가 있거든요. 손에 잡고 하는 건데 그게 진동이 심해서, 오래 쓰면 손바닥에 티눈이 생겨요. 너무 아프죠. 수술해야 하는데 산재로 인정도 안 해 주더라구요. 기타를 만드는 공정들이 쭉 있는데, 앞 공정이 끝나지 않으면 뒤 공정을 진행할 수가 없는 식이거든요. 그걸 못 이으면 8시 출근인데 6시 반에도 그냥 나오라고 해요. 아침부터 아무런 수당 없이 그냥 일하는 거죠. 그리고 밤에 일이 남으면 그대로 연장 근무를 하는 거고. 어떠한 수당도 없어요."

"2005년부터 자꾸만 회사는 적자라며 힘들다고 했어요. 이 말이 사실인 줄 알고 저희 노동자들은 정말 자재도 아끼고 시간외 수당을 쳐주지 않아도 참고 일했어요. 나중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알아보니 매년 100억 대의 이익을 남기는 알짜기업이었어요." -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증언 중에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30여 년 전 이야기가 아니다. 울릉도 아이들에게 기타를 전했다는 그 콜텍 문화재단의 모체인 ㈜콜트-콜텍에서 몇 년 전까지 그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밖을 쳐다보면 생산성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도 없는 공장. "빼빠질"과 그러인더질, 기타줄을 당기고 피스 등을 박다가 40% 넘는 이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던 공장. 밀폐된 도장실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현장 노동자의 59%가 직업병을 앓던 공장. 기관지 천식자가 36%, 만성기관지염 환자가 40%를 넘던 공장. "이 년, 저 년"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시때때로 징그러운 음담패설을 들으며 살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기타의 아름다운 몸을 위해서는 뼈마디가 저리도록 세심했다. 한 치의 흠도 없이 기타의 몸 구석구석을 빼빠질로 갈아냈고, 한 몸인 듯 자개 문양을 넣어주고, 색깔 옷을 입혀주고, 유약을 발라 닦아주었다. 기타줄 하나하나가 이들에겐 생명줄이었고, 목숨줄이었다. 마지막 조율을 마치고 예쁜 박스에 넣어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타 하나하나가 이들에겐 기쁨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고,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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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트-콜텍 원정단

노동자 절망공장 "콜트-콜텍"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 이 모든 고통이 아름다운 노래로 불려질 거라 소망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던 이들의 소박한 꿈과 노래는 2007년 산산조각 났다. 그간 30여 년 동안 이런 노동자들의 꿈과 노동을 혼자 독식해 한국 부자 순위 120위, 천억대의 자산가가 된 박영호 사장의 무한 욕심 탓이었다.

박 사장은 1993년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설립했고 1999년 중국에 공장을 세워 천천히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했고, 2007년 7월에는 대전 계룡시에 있는 콜텍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 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조정에 항의해 2007년 12월 콜트악기 노동자 이동호씨가 분신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위장폐업하고 말았다. 그렇게 수십 년간 기타를 만들어 왔던 사람들을 모두 길거리로 내몰았다.

그간 이들은 안해 본 게 없다. 15만kw의 전기가 흐르는 100여 미터 높이의 양화대교 옆 송전탑에 올라 단식농성도 했고, 새벽에 본사 건물에 들어갔다 경찰특공대들에게 끌려나오기도 했다. 독일과 미국, 일본 등 전세계의 악기상들과 음악인들을 상대로 여섯 번의 해외 원정 투쟁도 다녀와야 했다. 생계가 바닥나 고추장, 된장을 만들어 팔고, 지금도 수세미 뜨개질을 하며 언제 올지 모를 희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박영호 사장은 단 한 번도 이런 노동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용역 깡패들을 내세워 몇 번이고 테러와 같은 폭력을 자행했다. 박영호 사장에겐 법도 통하지 않았다. 2008년 중앙노동위원회는 사측의 부당해고를 확인해 주었다. 2009년 11월, 서울고법 행정1부(재판장 안영률) 역시 콜트악기의 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다"고 원직 복직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10년 4월 13일 서울고등법원은 2008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와 명예훼손"을 인정, 반론보도문 게재를 결정했다. <동아일보>는 "7년 파업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콜트악기 부평공장이 노조의 잦은 파업으로 적자가 누적돼 폐업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었다. 재판부는 이는 사실이 아니며 "폐업은 콜트악기 지배 주주인 "박영호"가 인도네시아와 중국 등 해외 공장으로 이전하려는 경영 계획 때문"임을 확인하고, 박영호 사장의 "근로기준법 위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한 혐의를 인정,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그 외 검찰은 윤석면 전 콜트악기 공동대표에게도 "부당노동행위"로 벌금 100만 원을 물렸다. 2007년 5월부터 노동자들이 정당한 단체교섭을 요청했음에도 이유 없이 거부한 죄였다. 같은 날 검찰은 콜트악기 관리과장인 이희용과 그가 동원한 12명의 용역에 대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상해교사"를 적용해 벌금 300만 원부터 30만 원을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호 사장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30여 년 가까이씩 일해 온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목을 자른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2009년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화되면서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증인 신청을 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그는 2010년 사재 일부를 출연해 자신과 콜트-콜텍에 대한 사회적·도덕적 압박을 무마하고자 "콜텍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씨(동국대 실용음악과 교수)와 이번에 울릉도에 기타를 기증하는데 다리가 된 강금선씨(옛 "동방의 불빛" 멤버) 등 저명한 음악인들 몇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콜텍 문화재단" 탄생의 공공연하지만 아직 범사회적으로는 숨겨진 비화이다. 콜텍 재단은 그 모토대로 사회적 "공감과 나눔,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아름다운 문화재단이 아니라, 30여 년에 걸친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현재도 중국 공장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일하는 2000여 명의 다국적 노동자들에 대한 상식 이하의 수탈을 딛고 선 "피의 재단"이자 이를 감추기 위한 "양의 탈"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나눔과 소통"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먼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노예였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만나야 한다. 그가 진정 문화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대한민국의 법만이라도 지켜 당장 부당해고한 그들에게 사과하고 원직복직시켜야 마땅하다. 이런 최소한의 윤리적 실천 이후에야 "문화"를 말할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진정한 미담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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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일본 "후지락 페스티벌"에 참석한 콜트-콜텍 노동자들  
ⓒ 콜트-콜텍 원정단  

콜텍 문화재단 홈페이지를 둘러보니 그간 기타와 강사를 보급하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가소로운 일이다. "2010 파주 헤이리 판 페스티벌"에서 "제1회 아마추어 어쿠스틱 기타 경연대회"를 주최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날짜를 보니 작년 9월 11일이다.

생각해보니 그 어름쯤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은 일본 "후지록 페스티벌"엘 갖다. 그것도 공식 초청이었다. 3박 4일동안 전세계에서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록 페스티벌이었다. 입장료만도 60만 원에 이르지만 티켓 구하는 것마저 힘들다는 페스티벌이었다. 한국에서라면 행사장 근처에 좌판 하나 까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왜 가수도 아닌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을 초청했을까.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지락 페스티벌의 공식 초청팀인 "원 데이 에즈 어 라이언(One day as a Lion)"의 세계적인 보컬인 잭 드 라 로차는 매니저와 주최 측의 우려를 물리치고 자신의 무대에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세워 주었다. 이 자리에 서기 위해 30여 년 기타를 만들어 왔던 늙은 노동자 방종운은 되풀이해 외웠다. 그의 말은 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세계 기타 시장 30%를 생산하는 콜트기타를 아시나요? 휀더, 아이바네즈 기타도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면서 수십 년간 좋은 기타를 만들었지만, 4년 전 콜트는 거짓말로 우리를 해고했습니다. 후지록 페스티벌에 참석하신 여러분, 기타를 사랑하신다면 저희들과 함께 해주십시오. 기타가 자유를 찾아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여러분들에게 호소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 진실이 통했는지 수만 명의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현 시대 록의 정신과 문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잭 드 라 로차는 이후 일본 순회 콘서트에도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초청해 주었다. 다음날 또 한 명의 초청가수였던 오조 매틀리 역시 자신의 오전·오후 무대에 모두 콜트-콜텍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을 세워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무대 스피커에 "노 콜트(NO CORT)"라고 새긴 티셔츠를 걸어두고 노래를 불렀다.

또 이런 미담은 어떠한가. 2010년 1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인 "남쇼"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남쇼"의 공식 홍보대사로 초청된 록그룹 "RATM(Rage Against the Machine,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 탐 모렐로의 공식 지지와 연대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탐 모렐로는 "기타는 착취가 아니라 해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면서 "작업장에서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한국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 누구도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탐 모렐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남쇼"의 공식 초대 가수들을 모아 콜트-콜텍 기타의 최대 주문사인 미국 "휀더"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CNN, NPR을 비롯한 미국 현지 주요 언론 인터뷰 및 직접적인 연락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휀더 측에 전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공신력 있는 기타 회사인 휀더사는 법률책임자인 마크 반 블릿과 홍보마케팅 담당자인 제이슨 패짓을 보내왔다.

그들은 "너무나 바쁜 남쇼 일정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장의 직접적인 지시로 휀더의 법률 책임자가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이 간담회에 참여한 것 자체가 여러분들이 휀더의 태도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라며 "이번 간담회를 시작으로 콜트-콜텍 문제에 대한 휀더의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그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당시 또 한 명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인 피닉스 벤자민의 연대 역시 힘이 되었다. 남쇼 직전 슈퍼볼(미식축구 프로리그 결승전)에서 공연을 한 피닉스 벤자민은 "우리는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된다. 기타 노동자와 뮤지션들이 함께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며 남쇼 개막 둘째 날인 1월 15일 원정단의 남쇼 행사장 앞 거리공연에 직접 참가해 주기도 했다.

당시 그곳에 콜트-콜텍사는 없었느냐고? 컨벤션 센터 안에 휘황찬란한 공식 부스를 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콜트-콜텍 사측 사람들은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기타회사 ESP의 맷 매시안다로 회장은 만났다. 그는 직접 찾아와 원정단 홍보물에 ESP가 언급된 것을 지적하고 "우리는 더 이상 콜트와 관계가 없다. 박영호 사장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도 거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홍보물에서 제외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영국의 기타 회사 아발론의 스티브 맥윌래스 역시 만날 수 있었다. 직접 찾아 온 그는 "우리는 독일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를 만났었다. 콜트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박영호 사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거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노동자들의 아픔이 서린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음악인들의 항의에 대한 답들이었다.

우리가 다시 불러야 할 연대의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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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인 "남쇼"에 참석한 콜트-콜텍 노동자들  
ⓒ 콜트-콜텍 원정단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환대와 연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홍대 앞 "클럽 빵"에서 3년여째 매달 마지막째 주 수요일 밤마다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고 있지만 늘 기대를 가지고 찾아오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별 관심들이 없다.

2009년엔 인디 뮤지션 40여 팀이 모여 "섬머 록 페스티벌"을 문 닫힌 인천 콜트 공장에서 열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박영호 사장은 용역들을 동원하고, 경찰에 시설보호 요청을 함으로써 뮤지션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주류 언론들은 이런 아름다운 사회적 연대와 미담에 눈감았다. 그렇게 5년여가 흘러가고 있다. 대중적인 뮤지션들은 모두 상업 프로덕션의 계약 관계에 묶여 눈치만 보고 있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과 사회적 진실을 깨우는 소리를 외면하고, 애써 스스로 값싼 광대나 상품만 되려고 한다.

사실 한국 음악의 원로 격이라는 이**씨나 강근식씨 같은 분들이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 텐데도 "콜텍 문화재단"의 얼굴마담으로 서 있는 것은 안타깝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제 밝히지만 그와 "소통"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콜텍 문화재단"에 함께 한다는 얘기를 듣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형평을 위해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역시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기를 간청했다.

하지만 돌아 온 것은 묵묵부답뿐이었다. 만날 필요도 못 느낀다는 전언이었다. 다시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판단에 서면으로 저간의 상황을 전하고 의견을 주십사 했지만 불통이었다. 난 지금이라도 이런 좋은 분들이 간교한 콜트-콜텍 자본의 놀음에서 놓여 나시길 간절히 부탁드려 본다.

"박영호 사장,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때깔만 번지르르하고 허울 좋은 문화재단 놀음이 아니라 최소한의 법을 지키는 것이며, 당신을 위해 수십 년씩 일한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다하는 것이오"라고 따끔하게 비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영호 사장 당신이 지금 할 일은 낙도 어린이 몇에게 기타 몇 대 보내주고 간질나게 언론 플레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다시 착취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다국적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근로조건을 제공하는 것이요" 라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신날까.

그가 번 천억대의 돈이 실상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혼자 독식한 결과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면 더욱 얼마나 기쁠까. 우리의 사회 문화가, 노동의 문화가, 분배의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왜 과도한 소유가 자랑이 아니라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혹독한 선생이 되어준다는 얼마나 눈물겨울까. 그런 음악인의 자세를 빼고 도대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예비 음악인들에게 어떤 문화적 소양을 가져라고 할 수 있을까. 기타에 숨겨져 있는 고단한 노동과 삶의 냄새를 감추고, 그 피비린내를 감추고, 코드나 가르쳐 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문화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저 바다 건너 탐 모렐로처럼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 한 곡을 만들어 보내준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그들을 위한 록 페스티벌을 열어준다면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 될까. 지금 한국사회에 그처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문화 사업"이 또 있을까.

그게 가능할 거냐고, 이건 단지 꿈일까? 그렇더라도 좋다. 진정한 문화예술은 아직 오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니까. 퇴락한 시대를 핑계로 사람들은 가능치 않을 거라고 하는 것들을 상상하며,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오늘도 고단한 영혼의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 일이니까. 가난하고 핍박 받더라도 영혼을 팔지 않는 일이니까. 그렇지 않나요. 모두 함께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존 레논, 이매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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