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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리비아 침략과 반혁명 기도는 실패할 것이다.
작성자 전태일노동대학
댓글 0건 조회 2,752회 작성일 2011-03-19

본문

 

제국주의의 리비아 침략과 반혁명 기도는 실패할 것이다.


                                                       김승호(전태일 노동대학 대표)


  

1. 들어가며

2. 사태는 평화적 시위로부터 순식간에 무장봉기와 내전으로 발전했다.

3. 무장봉기를 실행한 것은 청년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슬람주의 세력이다. 

4. 제국주의는 반혁명 쿠데타 기도가 실패하자 침략과 점령을 획책하고 있다. 

5. 제국주의는 반제국주의 연대전선 형성을 파탄내기 위해 리비아를 침략하고 있다.

6. 리비아 침략은 세계적인 반제,반자본 민주주의 혁명의 고양으로 귀결될 것이다.



1. 들어가며


리비아 사태가 한 달을 넘기고 있다. 형세는 전전반전(輾轉反轉)을 거듭하고 있다. 초장에는 카다피 정권이 금세 붕괴될 듯이 보도되더니 최근에는 반란군이 곧 괴멸될 듯하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더니 오늘 유엔 안보리에서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이 결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 러시아 등 상임이사국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기권함에 따라 표결에서 통과된 것이다. 이로써 미 제국주의를 필두로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세력은 리비아 상공을 지배하고 지상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면허장을 발부받은 셈이다.  

이렇게 외세가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됨으로써 리비아 사태는 더욱 앞날을 점치기 어렵게 되었다. 하루 전만 해도 정부군이 반란군의 최후 거점인 벵가지로 진격해 들어가서 이번 사태가 가다피를 정점으로 하는 리비아 정부 측의 완전승리로 끝날 듯 했던 것인데, 이 진격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이다. 또 설사 정부군이 벵가지로 진격해 들어가서 장악한다고 해도 트리폴리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제국주의 세력의 공습이 계속되어 리비아는 정상적인 경제,사회 활동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로 될 것이다. 1991년 걸프전 직후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어 수시로 폭격을 당했던 이라크처럼!

이러한 리비아 사태는 당연히 ‘지구인’1)들에게 남의 일이 아니다. 유엔 안보리가 개입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결코 어느 한 나라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 사태가 유엔에서 의제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구인들은 이 사태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방관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리비아 사태는 많은 지구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천안함 사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과연 서방언론이 묘사하는 것처럼 광적인 폭군인가? 무장봉기에 나선 사람들은 일반시민인가 알 카에다인가? 리비아 정부군은 과연 시위대를 향해 기총소사 했는가? 6천여 명이 죽었다는 어느 유명한 인권단체(‘휴먼 라이츠 워치’)의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

이런 여러 지점들이 사실대로 밝혀져야만 우리는 리비아 사태에 대해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아프간이나 이라크 사태의 경우처럼 제국주의의 침략에 방조하거나 방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구촌이 시산혈해(屍山血海)2)를 이루고 야만의 소굴로 굴러 떨어지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만만하지는 않다. 원체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데다 리비아 국영방송이든 서방 언론들이든 사실의 객관적 보도에 충실하기보다 리비아 국가와 제국주의 세력의 선전기구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갖고 있지만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며, 진실을 기초로 하여 지구인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입장을 찾아가고자 한다.


2. 사태는 평화적 시위로부터 순식간에 무장봉기와 내전으로 발전했다.


리비아 사태는 튀니지나 이집트의 시위사태와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 앞의 두 나라의 경우 생활상의 요구를 내걸었든 정치적 요구를 내걸었든 간에 평화적인 시위로써 시작되었고 사태가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 비무장 시위로써 진행되었다. 그러나 리비아의 경우에는 사태가 발생하던 초기인 2월 15일에서 17일까지의 짧은 평화적 시위 국면을 거친 후 곧바로 무장투쟁으로 비화되었다.


<평화시위에서 무장봉기로: 2월 15일 ~ 2월 20일>


리비아 사태는 느닷없이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격화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시위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동부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공영방송인 BBC 보도에 따르면 2월 15일 밤에서 16일 새벽까지 수백 명이 참여한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시위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 온 인권 변호사 「페티 타르벨(Fathi Terbil), 39세」씨가 구금된 것을 계기로 일어났으며, 체포된 변호사는 시위 직후 석방되었지만 시위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사용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와 최루탄, 고무탄을 발사했다. 이날 친정부 시위대도 리비아 전역에서 행진하며 시위했다.

이에 앞서 리비아의 해외 망명자 2백여 명이 2월 14일 리비아 국민들에게 카다피를 타도하고 정권을 교체할 것을 촉구했고, 시위대는 2월 17일을 ‘분노의 날’로 명명하며 페이스북 등으로 국민들에게 궐기할 것을 선동했다. 이 2월 17일은 2006년 경찰이 1,000여 명의 무슬림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14명이 숨진 벵가지 시위 5주년을 맞는 날이다.

시위는 16일에도 계속됐고, 리비아 동부 도시 알 바이다에서는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고 반정부 웹사이트 <리비아 알욤>이 주장했다. 이날 리비아 정부는 투옥 중이던 ‘리비아 이슬람 전사 그룹(약칭 LIFG)’ 구성원 110명의 석방을 약속했다.3)

‘분노의 날’로 명명된 2월 17일 시위는 수도인 트리폴리를 비롯해 여러 도시로 확산됐다. 특히 동부지방인 벵가지, 아즈바디아, 알 바이다, 다나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시위의 진원지인 벵가지에서도 시위대의 숫자는 수백 명 또는 1~2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전국적으로도 수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공공건물에 방화를 하는 등 폭력시위의 양상을 띠었고,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과 유럽의 인권단체들은 보안군과 혁명위원회 민병대가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총을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시위는 2월 18일에서 20일 사이에 비상하게 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시위대는 관공서, 경찰서, 방송국을 공격하고 불을 지르고 점거하는 등 더욱 과격한 폭력행동으로 나왔다. 2월 18일 알 바이다에서는 시위대가 시를 점령하고 친정부 민병대 2명을 처형했다. 벵가지에서는 2월 20일 시 지방정부(시 인민위원회) 청사와 경찰서, 라디오 방송국 등이 불탔으며, 수천 명 내지 수만 명의 시위대가 법원청사를 점거하였다. 시위대가 본부로 활용하고 있는 법원 건물에는 리비아 국기가 내려지고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사용됐던 왕정 시절의 국기가 게양됐다. 또 시위대는 폭탄을 실은 차량 등을 이용해 벵가지 시내에 있는 「알파딜 아부 오마르」 군 기지를 공격했으며 시위의 이런 폭력화에 대응하여 군과 경찰은 총기를 사용, 발포하면서 시위대 여러 명이 사망했다.

또 리비아 북서쪽 지역에서 2월 18일 스스로를 ‘바르카 이슬람 토후국’으로 부르는 한 그룹이 무장봉기하여 군인 네 명을 살해했다. 이 그룹은 항구를 공격하고, 70여 대의 군용차량을 탈취했다. 군 대령 한 명이 이들에 가담하여 무기를 제공했다.4)

수도인 트리폴리에서도 시위대가 알 자마히리야 TV와 알 샤바비아 방송국을 장악해 한 동안 방송이 중단되었고, 내무부와 인민위원회 청사, 경찰서 등이 불에 탔다.

이렇게 시위가 폭력으로 치달으면서 20일에 이르면 전체 사망자 수는 2백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됐다.(AP) 언론은 군이 시위대 진압을 위해 아프리카 출신 용병을 동원했으며 기관총, 박격포, 무장헬기로 시위대를 공격했다고 하면서 “저격수와 탱크가 포진한 현재 벵가지의 상황은 지옥과 다름없다”고 보도했다.(뉴욕타임스) BBC방송은 20일 현지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해 “벵가지 시 일부만 군부의 통제 아래 있고 나머지 지역은 해방됐다”고 전했다.

이상의 경과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리비아의 시위는 처음부터 카다피 정권 타도 투쟁으로 시작되고 2월 15~16일의 잠시 동안은 비무장 시위였지만(그러나 돌과 화염병을 던졌으므로 완전한 평화시위는 아니었다.) 17일부터 곧 폭력적인 행동으로 변했다. 그리고 2월 18일부터는 순식간에 시위가 아니라 점거, 방화, 처형, 군부대 공격 등 무장봉기의 모습을 띠어갔다.


20일에는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국영 텔레비전에 나와서 연설했다. 연설에서 그는 군사기지와 탱크, 무기 등이 반정부 시위대에 장악된 사실과 함께 군과 경찰이 시위대처 훈련을 받지 않아 실수를 저질렀다며 시위대에 대한 대응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또 헌법제정을 논의할 용의가 있다며 정치개혁 의사를 내비쳤다. 한편, 일련의 시위에서 사망자가 수백 명이 나왔다는 것을 과장이라고 부정하고 리비아의 내전 발발을 경고하였다.

2월 20일(현지 시간)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리비아 정부가 평화적인 시위대에 치명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캐서린 애슈턴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우리는 (리비아 정부에) 줄곧 자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ED)’ 등 24개 국제비정부기구(NGO) 단체들은 21일 리비아 사태에 국제사회가 즉각 개입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미국과 EU,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에게 보낸 서한에서 “리비아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광범한 잔학행위를 벌이고 있다.”며 유엔 안보리를 통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무장봉기에서 내전으로: 2월 21일 ~ >


2월 21일에는 리비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가 되었다. 반정부 시위대는 탈취한 정부군의 총과 포탄으로 무장하고 총을 쏘며 군과 경찰에 맞섰다. 반정부 시위대에서 반란군으로 성격이 변한 것이다. 수도인 트리폴리에도 온종일 시위대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트리폴리는 정부군의 통제가 유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측이 헬리콥터와 전투기를 동원했다고 보도됐다. 반면, 반군은 벵가지에 이어 토브룩과 그 외 다른 주요 도시들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그곳에는 리비아 국기가 내려지고 반군 국기인 옛 왕정 국기가 휘날렸다. 리비아는 정부군이 장악한 지역과 반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양분되고 영토를 쟁탈하기 위한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리비아 동부지역 즉 키레나이카 지역은 반군의 해방구가 되었다.5)

이날 시위 진압에 나섰던 전투기 두 대가 인근 국가인 몰타에 망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카다피가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런 유언비어를 불식시키고자 저녁 늦게 카다피는 방송을 통해 "나는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트리폴리에 있다. 길 잃은 개들(서방기자)의 방송 채널을 믿지 마라"며 건재를 과시했다.


2월 22일 리비아 국영 TV는 리비아 국가안보위원회가 지난 주 리비아 시위로 인해 총 300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300명 중 군인은 111명, 시민은 189명인 것으로 각각 조사됐다.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는 시민 104명과 군인 10명이 숨지는 등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반(反)전쟁범죄 국제연대’라는 인권단체는 사망자가 519명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슬람권 웹사이트인 <온 이슬람 넷>은 600여명 이라고 주장했다. 

한 시민은 “오늘 정부군의 작전 목적은 시위 해산이 아니라 반정부 시위대 사살인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는 국영 TV에 출연해 “전투기의 목표물은 시내가 아니라 시외의 탄약보급창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이날 저녁 카다피는 국영 텔레비전에 나와 “무아마르 카다피는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날 수도 없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라며 “이곳은 내 조국, 바로 내 조국이고, 나는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연설을 한 장소는 1980년대 레이건 정권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파손된 트리폴리 관저의 한 건물 앞이었으며, 원고 없이 연설을 하며 수시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연단을 내려치며, “나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의지를 밝히는 등 비장한 모습이었다.


2월 23일에는 반정부 시위대가 동부의 벵가지, 토브룩 외에 미스라타 등 중부지역과 사하브 등 남부지역을 등을 장악했다. 이제 리비아 내전은 반군 측이 장악한 동부, 중부 및 남부지역과 정부군이 우세한 서북부 지역으로 나뉘어진 가운데 반군이 수도권의 정부군을 압박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반정부 시위대는 이제 ‘혁명군’을 자처하며 현 리비아 국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시도했다. 이날「칼레드 카심」 외무차관은 리비아 동부 다나 지역에 「압델 카림 알 하사디」가 이끄는 알 카에다 세력이 토후국 수립을 주장하며 일대에 대한 장악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또 이날 알 카에다의 북아프리카 지부(AQIOM)가 카다피의 퇴진을 요구하는 리비아 반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카타르 국왕이 재정을 지원하는 반 카다피 성향의 <알 자지라> 방송은 2월 24일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자위야에서 카다피 측 병력이 반정부 시위대를 공격, 교전이 벌어져 100명 이상이 숨졌다고 했다. 이에 대해 카다피는 반군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리폴리 인근인 자위야에서 벌어진 교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제 이 사안이 알 카에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지역의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잘못 행동하도록 지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둔 수아예」 몰타 주재 리비아 대사도 이날 대사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알 카에다와 연계된 외국인 요원 약 2,500명이 반정부 시위에 개입했다”면서 “인명살상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군의 근거지인 벵가지에서는 15인의 유력인사로 시 자치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시를 방어할 자체 군 부대 창설 문제가 논의됐다. 시 자치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임된 인권 변호사 「페티 타르벨」은 “원래 봉기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닌데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한편,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날 리비아 사태에 대한 연설을 통해 "리비아의 유혈사태와 고통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며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리비아에서의 폭력 사용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안들을 준비하라고 행정부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도 "(리비아의) 폭력 사태를 종식시키고 (리비아) 정부에 영향을 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UN 안보리는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언론발표문을 의결하였다.


25일에 반군 세력은 트리폴리 시내에서는 대규모 시위를 선동하고 시 외곽에서는 공격을 감행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카다피가 녹색광장의 건물 옥상에 나타나 녹색 기를 흔들면서 "석유를 사수하고 리비아의 독립과 영광을 지켜내자. 적당한 시기에 모든 무기고를 열어 모든 리비아인과 부족민들을 무장시킬 것이다. 리비아는 피로 물들 것이다."라는 연설을 했다.

한편, 사태 초기에 반군 측에 가담한 「아브라힘 다바시」유엔주재 리비아 부대사는 기자들에게 카다피는 반군에 생포돼진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그는 살해당하거나 자살하기 전까지는 끝가지 버틸 것”이라면서 “이미 수천 명의 시민이 숨졌으며 우리는 인명피해가 더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다”고 하면서 “국제사회가 리비아 사태에 개입해 줄 것”을 촉구했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 본 데서 보듯이 반정부 시위는 2월 18일부터 폭력시위의 수준을 넘어서 무장봉기의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2월 21일부터는 내전이 되었다. 반군은 키레나이카 지방의 수도인 벵가지를 필두로 해서 동부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한 다음 트리폴리를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전술을 취하였다. 정부 측도 반정부 세력이 옛 왕정 깃발을 들고 무장봉기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반(反)봉기 전술로 대응하였으며, 이후 쌍방 간에 치열한 교전(交戰) 즉 내전이 벌어졌다. 그 이후 내전이 어떻게 반군 측의 공세로부터 정부군의 공세로 전세가 역전되었는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한다.


3. 무장봉기를 실행한 것은 청년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슬람주의 세력이다.


리비아 사태에서 봉기의 주역은 누구인가? ‘2.17 청년운동’인가? 아니면 「아부드 알 젤레일」전 법무장관과 같은 친 서방 관료들인가? 아니면 반 카다피 부족장들인가? 이번 봉기에서 이 여러 세력들이 모두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쪽도 현재까지 이 사태를 주도하거나 이끌고 있지 않다.


첫째 「알 젤레일」 전 법무장관, 전 내무장관인 「압델 파타흐 유네스 알 아비디」 장군(그의 가족은 동부 지역 출신이다),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 「아브라힘 다바시」, 영국,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방글라데시, 폴란드, 미국 주재 대사 또는 부대사, 아랍연맹 주재 리비아 대표 「엘 호니」 등이 카다피에게 등을 돌렸다. 군에서도 반(反) 카다피 장교들이 나왔고, 전투기 조종사는 비행기를 몰고 이웃나라 몰타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카다피 정권의 국가자본주의 정치노선에 대해 적대한다기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카다피 정부가 대응하는 모습에 반대하여 카다피를 이반하고 시위대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더구나 카다피의 차남이며 실세인 「알 이슬람 카다피」의 시장자본주의 노선은 이들과 가까우면 가깝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사태의 조역일지언정 주역일 수는 없다. 카다피 정권을 전복하려는 무장봉기 세력은 카다피 정권의 정치노선에 대해 분명하게 적대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현 리비아의 국기가 아닌 다른 국기인 이전 왕정 시대의 국기를 들고 나왔다. 정권 전복을 넘어 국가전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2.17 청년운동’인가? 이들은 2월 15~16일에 평화적 시위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집트 1월 25일 시위를 본떠서 페이스북으로 2월 17일 ‘분노의 날’ 시위를 조직했다.6) 그러나 그것에 접속한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반정부 세력의 웹사이트가 보도한 바로는 “이 페이스북 그룹의 회원수가 14일 4,400명에서 불과 이틀 만에 9,600명으로 늘어나는 등 젊은 층의 참여가 높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수는 수 천 명 수준으로서 수 만 명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참여자들은, 우리나라 촛불시위의 경우에서 보듯이, 폭력적인 탄압에 직면해서는 대부분 움츠러든다. 실제로 리비아에서는 사태가 빠르게 폭력적인 투쟁과 탄압의 대결로 치달았기 때문에 이 사이버 청년운동의 역할은 사태를 촉발하던 당시 이외에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 청년조직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어느 자료는 2월 17일 ‘분노의 날’ 봉기를 ‘리비아 구국 민족전선(NFSL)’이 조직했다고 말하고 있다.7)


셋째, 카다피에 반대하는 부족장들인가? 일부 부족장들은 초기에 카다피에게 등을 돌렸다. 2월 20일자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예컨대 리비아 동부 벵가지 남쪽에 있는 ‘알 즈와야’ 부족의 지도자 「샤이크 파라지 알 즈와이」는 시위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지 않으면 24시간 이내에 서방국가로의 원유수출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또 리비아 최대부족의 하나로서 트리폴리 남쪽에 살고 있는 ‘알 와르팔라’ 부족의 지도자인 「알 아크람 알 와팔리」도 “우리는 형제(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게 그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고 말 할 것”이라며 “그에게 리비아를 떠나라고 말할 것”이라고 <알 자지라> 방송에게 말하였다.8) 그러나 이후 이 부족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카다피가 부족들을 잘 관리해 왔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하는 분석도 있다. 트리폴리에 있는 학술원의 M.B.A 과정 책임자인 「무스타파 페투리」교수는 카다피와 한때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일부 부족 지도자들조차도 반정부 시위대가 무장 반군으로 변모하자 카다피 편에 서서 싸울 정도로 카다피와 부족 지도자들 간의 결속이 확고한 상태라고 말했다 한다.9) 그렇다면 이 부족장들 역시 이번 사태의 주동자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이슬람주의 조직이다. <뉴욕 타임스> 2월 24일자 1면에 실린 기사는 리비아 사태가 아랍 세계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타 민중투쟁과 어떻게 다른지 잘 설명하고 있다. “페이스북이 청년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게 한 것과는 달리 리비아에서는 봉기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나이든 어른들이고, 과거 한때 카다피 정권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다.”10) 이 기사는 무기들이 어떻게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여러 주일에 걸쳐 밀수입되었는지, 그리하여 “일주일 밖에 되지 않는 단기간에 시위가 신속히 평화시위에서 무장봉기로 에스컬레이트 되도록 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무기상으로부터 7만5천 달러를 주고 자동화 무기를 구입, 시위대에 제공했다.”고 한다. 또 “시위대는 군부대 약탈, 국경지역을 통한 밀수 등의 경로로 소형 개인화기뿐 아니라 로켓 추진형 유탄발사기 등 중화기와 자동화 무기까지 확보했다.”고 전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무기를 밀수하고 무장봉기를 기도했는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세력이 ‘리비아 구국 민족전선(National Front for the Salvation of Libya: NFSL)’이다. 이 조직은 1981년에 건설되었는데, 미 CIA가 재정지원을 하고 있으며,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이 조직은 ‘리비아 민족군(Libyan National Army)"으로 불리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집트 국경 근처에 소재하고 있다.11)

그와 함께 널리 언급되고 있는 것이 ‘리비아 야권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for the Libyan Opposition: NCLO)’이다. 이 연합체는 ‘리비아 민족 구국전선’이 주도하여 조직한 것인데,  이 연합체가 사용하고 있는 깃발은 카다피 이전 리비아 왕국의 국기이며 - 그런데 이드리스 왕의 깃발은 리비아 국민들에게는 예전 식민세력의 지배를 상징한다. - 이 연합 안에는 ‘리비아 헌정 연방(Libyan Constitutional Union)’이라는 조직이 들어 있다. 이 조직은 리비아 왕세자를 자칭하는 「무하마드 아스-세누이」가 이끌고 있으며, 리비아 국민들에게 카다피에 의해 축출된 「이드리스 엘-세누시」 왕을 리비아의 역사적 지도자로 받드는 충성맹세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12)

미 CIA가 재정을 지원하는 이 군대와 낡은 왕정주의자들은 이집트나 튀니지에서 미국이 지지하는 독재자에 맞서 시위에 나섰던, 그리고 지금 바레인, 예멘과 오만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권리를 되찾고자 떨쳐나선 수백 만 명의 청년이나 노동자들과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전혀 다르다. 이 나라들의 청년과 노동자들이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처음부터 외세의 개입을 요청했다. 예컨대 ‘리비아 구국 민족전선’의 사무부총장인 「무아마드 알리 아브달라」는 외세의 개입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우리는 학살될 것이다.” “국제사회가 개입해 주도록 SOS를 보낸다.” 국제사회가 개입해서 카다피를 막아주지 않으면 “48시간 안에 리비아에서 피바다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제국주의자들은 신속히 응답했다. 리비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유엔 안보리의 결의로써! 이 정도로 손발을 척척 맞추려면 미리 각본을 짜놓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다.    


4. 제국주의는 반혁명 쿠데타 기도가 실패하자 침략과 점령을 획책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에 대한 제국주의의 대응은 매우 특이하다. 이른바 중동?북아프리카 사태에 대하여 미국의 대응은 분명했다.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적절한 수준에서 고무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여 민주주의 혁명 없이 민주화 이행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혁명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향 하에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정권의 얼굴을 바꾸게 하면서 정권의 체제를 유지시켰다. 예방혁명의 성공이었다.

바레인과 예멘에서도 그렇게 적절하게 조절하고자 했으나 시위대중이 혁명적인 요구를 함으로써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바레인의 경우 민중은 즉각적인 왕정 폐지라는 민주주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으나 미국은 시위대에게 자제를 말하고 있으며, 투쟁이 고양되면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등의 군대가 개입했다. 예멘에서도 살레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정부 사이에 두 달째 격돌이 계속되고 있고 오늘(3월 18일) 군?경의 발포로 3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비행금지구역 설치는 물론이고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하는 말조차 일절 하지 않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 비해서 리비아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다.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는 시위가 발생하기 전부터 이집트 다음은 리비아라는 식으로 말해 왔다. 그리고 시위가 발생하자마자   개입했다. 첫 단추는 카다피가 베네수엘라로 도주했다는 ‘거짓말 퍼뜨리기’로 시작되었다. 이 유언비어는 2월 20일 미국정부가 설립한 아랍어 방송인 <알 후라>와 카타르 국왕이 재정을 지원하는 반 카다피 성향의 <알 자지라> 방송이 퍼뜨린 것이다. 이 유언비어는 리비아 정부와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에 의해 즉각 부정되었으나, 영국 외무장관 「윌리엄 헤이그」는 다음날에도 그 가능성을 다시 제시하였다. 이는 카다피가 아프리카 대륙을 대표하여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하는 차베스와 함께 반(反) 제국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거짓 선전 공세에 대응하느라 카다피는 2월 21일 오후 늦게 직접 국영 TV에 출연하여 자신은 트리폴리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약 20초 가량의 짧은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2월 21일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유럽연합 「캐서린 애슈턴」 외무담당 최고위원, 아랍연맹의「아미르 무사」 사무총장과 나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집트,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의 국가들이 일제히 리비아 정부에 대해 평화적인 시위대에 폭력진압을 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또 유엔 안보리가 열리고, 이때 리비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리비아 영공 비행금지구역 선포를 추진했다. 일본은 리비아 전역을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대피 권고(한국의 여행금지에 해당) 지역’으로 지정했다. 유수의 석유회사인 ‘영국석유(BP)’는 사막에서 진행 중이던 유전탐사 작업을 중단시키고 필수요원만 남기고 직원 및 가족을 철수시켰다. 영국은 그렇다 치고 지진과 쓰나미가 오고, 원전에 방사능이 누출되는 초대형 재난이 와도 국민들을 대피시키는 데 인색한 일본 정부가 보인 이런 모습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2월 22일에도 또 엄청난 거짓선전이 계속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트리폴리에서만 8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또 카다피와 그의 아들 및 이번 “학살을 일으킨 인물들을 기소”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국제인권 비영리기구인 ‘민간인 학살 개입 네트워크’는 리비아에 이라크에 예전에 설정되었던 것과 같은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알 아라비아>는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이 리비아의 국가구조가 무너지는 징후가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알 자지라>는 리비아의 주요 도시인 벵가지는 용병으로 포위되어 있으며, 트리폴리 입구를 시위대의 진입을 방지하기 위해 용병들이 막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 지는 카다피가 산유시설을 폭파할 것을 명령했다고 보도했고, 시위대를 향해 총 쏘기를 거부한 군인 100여 명을 화형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관련 동영상과 함께 인터넷에 퍼졌다. 이날도 카다피는 이런 거짓 선전공세에 대응하여 자신과 리비아 국가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1986년에 미국이 폭격했던 곳을 연설 장소로 잡고 장시간 연설했다.


이런 거짓선전에 근거하여 유엔 안보리는 2월 26일 리비아 제재 결의를 채택했다. 제재의 내용은 카다피 정권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와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카다피와 그 자녀 및 핵심 측근에 대한 여행금지 및 해외자산 동결 등이다. 이런 속전속결식 제재 결의는 카다피 정권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1천 여 명이 숨진 현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또 안보리 전체회의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이 “시간을 끌수록 인명이 희생된다.”며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할 것”을 촉구한 것이 안보리의 속전속결식 결의 채택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3월 1일에 유엔총회는 리비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켰다. 자국민에 대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위반”을 이유로! 그러나 이라크나 아프간을 침략하여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데 대해 아직도 제국(帝國)인 미국을 제재한 바가 없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광범위한 인권 침해로 징계를 한 바도 없다.


이에서 보듯이 제국주의는 비정부 기구를 동원하여 평화적인 시위대에 대한 카다피 정권의 일방적인 무력탄압에 의해 수백 명의 사망자가 속출하는 인도주의적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을 편파적이고 과장되게 주장하게 하고, 권위 있는 사람의 입을 빌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과 국가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카다피와 리비아 국가가 상식 밖의 폭거와 야만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런저런 거짓말들을 익명으로 만들어내고, 이런 거짓말들을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여 퍼뜨리게 하고, 이를 근거로 리비아에 대한 유엔 제재 결정을 이끌어내고, 그럼으로써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 보편적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정당화하는 비열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를 침략하여 후세인 정권을 축출할 때 써먹던 수법과 너무나 비슷하다. 후세인을 악마화하는 것에서부터 유엔을 동원하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무력침공과 점령을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는 아마 침략보다는 쿠데타에 의해 카다피를 축출하는 것을 플랜 A로 했던 것 같다. 그들이 「사이프 알 카다피」에게 플랜 A는 무엇이고 플랜 B는 무엇인지 물은 것을 보면 그들 스스로가 몇 개의 플랜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플랜 A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비롯한 반 카다피 세력을 총 동원하여 쿠데타로 카다피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경우 이슬람주의 세력이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미 국무장관 힐러리는 현 국가체제가 완전히 붕괴할 경우 소말리아처럼 될지 모른다며 우려하는 말을 흘렸다.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가 군사적으로 침략,점령하는 것이다. 이 경우 카다피도 제거하면서 ‘이슬람 국가화’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쿠데타를 통한 체제전환에 실패한 지금 제국주의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침략과 점령 플랜을 추진하고 있다.13)

           

5. 제국주의는 반제국주의 연대전선 형성을 파탄내기 위해 리비아를 침략하고 있다.


그러면 제국주의는 왜 리비아를 침략하고 점령하고자 하는가? 피델 카스트로는 ‘성찰(Reflection)’에서 여러 차례 제국주의가 리비아의 석유를 차지하려고 침략을 획책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카다피 자신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14)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지니고 있다. 세계 석유매장량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매장량의 두 배에 달한다. 게다가 리비아의 석유는 채굴비가 배럴당 1달러로 극히 싸다. 석유 1배럴을 1달러에 생산해서 100달러를 받고 팔면 99달러를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주의적 임무를 위임받았다는 구실로 리비아를 침략,점령하여 석유산업을 차지하면 노다지를 캘 수 있게 된다. 이라크 침략이 그러했던 것처럼 리비아 침략도 이 석유 탈취를 노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15)

그러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뿐이라면 제국주의가 굳이 침략전쟁을 벌이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리비아의 석유는 불완전하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제국주의 나라들에 의해 합작으로 소유되고 있다. 또 리비아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점차 석유산업을 더욱 사유화하는 방향을 걷고 있다. 따라서 사유화를 통해 석유산업을 외국자본이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제국주의 나라들은 굳이 침략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점진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또 만약 이탈리아가 소유한 석유자원을 미국과 영국이 빼앗는 것에 리비아 침략의 목적이 있다면 이탈리아는 카다피 편에 서서 미?영,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워야 마땅하다. 중국이 리비아 석유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약간의 일리는 있다.16)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침략전쟁을 할 필요까지 있을까?  

이처럼 제국주의 세력이 총 연합한 리비아 침략은 단지 석유자원 쟁탈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 하나는 리비아는 현재 아프리카 연합의 의장국이라는 사실이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연합의 의장으로서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의 국가연합으로 단결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17) 이것은 아프리카 민중들이 범 대륙적으로 크게 단결함으로써 서구 제국주의의 오랜 지배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미국과 나토는 지금 세계 경제대공황 정세 속에서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재(再) 식민지화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프로젝트는 불가피하게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이 아프리카 국가연합 형성과도 관련되지만, 카다피는 차베스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나라들의 연대와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이들의 주도 하에 2009년 9월 베네수엘라의 마르가리타 섬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여러 정상들이 회동하여 제국주의의 지배와 수탈에 맞서서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기로 뜻을 모으고, 2년에 한번 씩 정상들이 회동하는 정기 회의를 갖기로 했다. 그리고 이 정상회의의 서기국을 차베스가 직접 관장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은 바로 그 정상회의가 열리는 해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대공황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만큼 이번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정상회의’는 매우 담대한 결의를 할 가능성이 많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자원과 시장에 대한 지배력의 후퇴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될 때 미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현존 제국주의 모두가 후퇴를 요구받을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가 미 제국주의와 행보를 척척 맞추고 있는 반면,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이 소극적이지만 리비아 군사제재에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짐바브웨의 무가베 등이 가장 적극적으로 카다피 편에 선 것은 이들 또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두 대륙 약소국들의 반제국주의 연대 및 협력에 매우 적극적인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영국 외무부 장관과 미국 방송사가 손발을 맞추어 카다피가 베네수엘라로 도망갔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6. 리비아 침략은 세계적인 반제,반자본 민주주의 혁명의 고양으로 귀결될 것이다.


리비아 사태를 민주와 독재의 대립이라는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전망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분명히 민주와 독재의 대립 요소가 배경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규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와 피지배 식민지와의 모순과 대립이다. 카다피는 등장할 때부터 이 모순의 한쪽 편에 선 혁명세력이었다. 리비아는 1970~80년대에 다양한 맑스주의자와 반 이스라엘주의 투사들의 기지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한 이후 한 동안 카다피는 제국주의에 투항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반제국주의 투쟁의 깃발을 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카다피와 리비아 민중에게 제국주의의 침략이 가해질 때 결코 순순히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라크와 같은 침략이 이루어진다면 이슬람주의자든 세속주의자든 리비아 민중은 모두 총을 들고 싸울 것이다.

리비아 민중이 그와 같이 투쟁할 때 아랍과 이슬람권의 민중들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에서부터 나이지리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민중이 투쟁으로 떨쳐나설 것이다. 지금 이미 혁명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바레인, 예멘의 민중은 물론이고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쿠웨이트, 오만, 알제리, 모로코 등의 수많은 아랍?이슬람 나라들에서 민주주의 투쟁과 결합되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반제국주의 투쟁은 특정한 정당이나 종교집단이 아니라 광범위한 민중을 주체로 할 것이며, 자본과 독재권력에 맞서는 민주주의 혁명을 동반할 것이다.18) 


이 대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누구도 점을 치듯이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리비아 사태는 제국주의의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시의 이라크 침략이 미 제국주의의 몰락을 재촉하였기에 헤게모니를 가진 제국으로 바꾸기 위해 오바마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렇게 부시를 탈피하기 위해 들어선 정권이 4년이 되지 않아 부시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고 하면 그 앞날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은 세계대공황이 진행 중이고 거기에다 제국의 한 축인 일본이 자연재해인 지진과 쓰나미와 인재(人災)인 원자력 발전기 폭발이 겹쳐 총체적 붕괴 과정에 있다. 이런데도 노동자,민중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 분명, 지구인들이 크게 각성하고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떨쳐나설 것이다. 특히 세계의 노동자계급이 그 투쟁의 선두에 설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인 사용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수십억 명으로 이루어진 노동자계급 말고 그 누가 이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런 추세를 보여주었다면 최근 중동,북아프리카의 노동자들이 이런 추세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제 리비아 노동자를 비롯한 아프리카 노동자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추세를 더욱 강화시켜 나갈 것이다. 제국주의의 리비아 침략은 이 추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될 것이다.   

  

2011년 3월 18일







1) 일본 동북 지방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 위기는 우리가 민족국가 단위로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 의지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지구인’이라는 말을 써 본다.


 2) 수구세력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인데, <2011 리비아 민주화운동 - 엔하위키 미러>에서도 2월 21일자 트리폴리의 시위상황을 “비무장 시위대에게 자국 군대에 의한 비행기 폭격이 진행되고 있다. 폭격으로 250여 명이 사망했다는 말이 나오는, 시산혈해의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행기에 의한 비무장 시위대 폭격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영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강조는 원문) 


 3) 이 그룹은 성전(지하드)주의자들로서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체첸, 이라크 등의 군사작전에 참여해 왔다. 이들 중 일부가 199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리비아로 돌아와 카다피 암살을 비롯한 반 카다피 저강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1995년에 자신을 ‘리비아 이슬람 전사 그룹(Libyan Islamic Fighting Group: LIFG)’으로 명명했다. 이 조직은 2007년 11월 공식적으로 알 카에다에 가맹했다. 이에 맞서 카다피는 이들의 본거지인 다나와 벵가지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철권을 휘두르며 탄압했다. 바로 이 두 도시가 이번 봉기에서 가장 강력한 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리비아에서 성전주의자들이 맞은 기회”, Scott Stewart,  <STRATFOR> 2011년 2월 24일 참조.


 4) David Rothscum, “CIA가 리비아를 혼란에 빠뜨리자 세계가 환호하고 있다.” <글로벌 리서치> 2011년 3월 2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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