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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정규직 이기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현대차 장기근속자 자녀 채용 가산점 비판 잘못 … 비정규직 투쟁 외면 비판해야
정규직노조 집단이기주의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정규직이 비정규직 때문에 임금, 고용의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대표적 주장이 ‘정규직고용 방패막이’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다. 회사가 어려우면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할 수 있기 때문에 정규직 고용은 일단 보장된다는 논리다.
두 번째, 정규직노조의 ‘집단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최근 현대차지부가 장기근속 조합원들의 자녀들에게 채용시 가산점을 주는 요구안을 확정하자 “끝이 없는 이기주의” “‘고용 세습’을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한 노동 귀족의 횡포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에는 모두 비정규직이 정규직 때문이라는 자본의 분열이데올로기를 전제하고 있다.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비판
첫째, 집단성 즉 노동자계급 단결성에 대한 공격과 적대감을 담고 있다. 대체로 ‘이기주의’란 개인주의의 일종으로 자신의 이익 때문에 공공선을 침해한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개인적 이기주의와 달리 집단이기주의는 반드시 공공선을 침해한다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라는 의미가 있다. 즉 개인적 영달과 출세를 전제한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같은 내용인 냥 동시에 보는 것은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들의 특징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고용세습’을 비아냥거리면서 “의사, 변호사 등 모든 직종의 종사자들이 사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직업을 대물림하는 세습권을 갖겠다고 나서면 이 나라가 어찌 될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명망, 출세, 권력 등 개인적 출세주의가 노동자집단성과 같을 수 없다. 노동자들은 개인의 출세 방식이 아니라 집단적 단결을 통해 고용, 임금인상 뿐 아니라 인간적 존중도 쟁취해 왔다.
오히려 이런 주장 밑에 있는 보수언론, 자본 등의 노동자집단성에 대한 증오감과 노동자 단결력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에 대한 엄청난 반감과 분노를 짚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언론들은 집단이기주의 비판 속에서 ‘타임오프 반대를 위한 쟁의발생 결의’와 ‘사업 확장과 차종별 생산라인 변경 같은 경영 차원의 결정 때까지 발언권 행사’(<조선일보>) 즉 현장파업에 노골적인 불만과 적대감을 드러냈다.
정규직 고임금이 비정규직 희생 때문이다?
두 번째, 정규직의 임금 특히 고용이 비정규직의 희생을 통해 이뤄졌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참으로 불행하게도 중요한 노동계급의 역사와 투쟁 기억을 잃어버리고 기억의 망각 속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비정규직 특히 파견직의 확대는 1996~19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1998년 기만적 노사정합의를 통해 파견법 합법화가 도입되면서부터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중간착취를 금지했던 직업안정법을 뛰어넘어 간접고용, 중간착취법인 파견법을 날치기 통과했고 이것은 비정규직 양산을 이루는 기점이 되고 말았다.
이 파견법 확대는 고용과 임금을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힘과 투쟁 때문에 ‘경직’됐다고 봤던 자본가들의 ‘노동유연화’ 요구이자 소원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노동유연화를 위해 근로기준법 개악, 전임자임금금지, 복수노조법 창구단일화법 등 노조법 개악 등을 추진해 왔고, 최근 이명박 정권은 파견법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기 위해 직업안정법 개악마저 손을 대려 하고 있다.
따라서 정규직 고용의 경직성을 타개하기 위한 파견법, 비정규직 확대를 부른 것은 정규직노조가 아니라 이 나라 정권들과 자본들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보수언론들은 비정규직 확산과 노동유연화 확대의 공범자들이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착취당할 뿐
세 번째, 맑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정규직 고용과 비정규직 고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맑스가 노동이 사회적 부의 원천이라고 이미 밝혔던 리카도 등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뛰어넘었던 핵심내용은 잉여노동의 존재다. 즉 노동자들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사회적 평균노동시간 이외 시간까지 자본가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한만큼 정당하게 돈을 벌지 못 하고, 자본가를 위해 지불받지 않는 많은 시간을 일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야간노동, 주말 노동 같은 장시간 노동(절대적 노동시간) 증가 아니라 자동화 등을 통해 노동강도가 완화됐음에도 노동시간은 거의 줄지 않았다.(상대적 노동시간) ‘잉여노동=착취’라는 개념이야말로 자본주의 이윤의 본질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정규직 모두 자본가들의 착취 받는 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 한 치의 차이도 없다. 다만 착취의 정도 차이가 있다. 즉 정규직이 10시간 노동 중 5시간을 임금, 복지, 의료비 지원 등으로 생활임금을 받고 5시간을 자본가들을 위해 일한다면, 비정규직은 10시간 노동 중 2시간 정도의 임금과 보잘 것 없는 복지 지원을 받고 나머지 8시간을 자본가들을 위해 무보수로 일한다고 보면 된다. 자본가들은 착취 증대 즉 이윤을 더 늘리기 위해 비용이 더 적게 드는 비정규직 고용을 선호해 왔다.
맑스주의 경제학의 핵심인 잉여가치 노동을 이해한다면,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고용과 임금을 빼앗는다는 주장이 자본의 노노분열 이데올로기임을 밝힐 수 있다.
현대차지부 문제는 비정규직 투쟁 외면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겨레>, <경향신문> 등도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통해 이득을 본다는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사내하도급 남용과 비정규직 양산, 청년실업 확산 등 고용위기가 임계점을 넘어선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들이 제 밥그릇 챙기기로 고립을 자초함으로써 노동연대를 약화시키고 고용구조의 혁신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겨레> 역시 “정규직 자녀에 대한 채용 특혜를 요구하면 형편이 나은 노동자들이 더 어려운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비난을 사지 않을 수 없다”면서 “현대차노조의 요구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주장들은 정규직 고용, 임금을 비정규직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조·중·동 보수언론들처럼 자본주의 착취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노동자 집단성에 대한 보수언론, 자본의 적대감과 비난을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규직노조의 비판을 조·중·동에 묻어가면서 혹은 자본에 묻어가는 방식은 대단히 위험하다. 보수언론들은 결국 정규직노조 집단이기주의를 결국 파업, 투쟁에 대한 반대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현대차지부의 조합원 자녀에 대한 채용시 가산점의 문제점은 비정규직 고용 및 임금과 상관이 없고 사회적 지탄을 받을 만큼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현대차지부가 지난해 11월부터 있었던 불법파견 정규직화 파업투쟁을 확대하기는커녕 찬물을 끼얹은 배신행위와 비정규직 징계 및 해고에 대해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에 있다.
현대차지부의 비정규직 연대를 촉구하기 위한 방식과 방법은 모두 보수언론 혹은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는, 노동자계급 독자적 방식과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쪽에 보수언론 및 자본과 싸워야 할 큰 방패와 창을, 다른 한쪽에는 정규직노조 지도부의 보수성에 맞서는 작은 방패와 창, 이 두 가지가 각각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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