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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공장’서 손가락 잘리고 분신까지 했지만…(한겨레)
작성자 콜트빨간모자
댓글 0건 조회 2,877회 작성일 201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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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공장’서 손가락 잘리고 분신까지 했지만…
[하니Only] 김도형 기자

제2의 김진숙, 제3의 한진중]
1791일째 정리해고 철회 투쟁 중인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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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폐업신고된 기타제조업체 콜트 공장 안에서 4년 10개월째 농성중인 노조원들. 김도형 기자

흑자기업 폐업신고에 ‘공장 돌려달라’ 분신·송전탑 고공시위까지
노사 양쪽 소송만 45건…장기투쟁으로 생계는 벼랑끝에 내몰려
“연락처 좀 적어주세요.” 습관대로 이렇게 말하고 곧바로 아차 싶었다. 그의 화상 입은 오른쪽 손가락 전체가 온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손이 이래서 필체가 엉망이네요.” 아주 못 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미안해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의 오른손 뿐만이 아니었다. 왼손 중지 손가락 한마디가 잘려 나갔고 검지 손가락도 잘린 흔적이 있었다.

을씨년스런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13일 오후 인천시 부평의 폐업된 기타제조업체인 콜트 공장 부지 안 임시 천막 농성장. 이동호(47) 콜트노조 사무장의 성치않은 손가락 세개는 그가 해고되기 전 어떤 환경 속에서 일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1년1개월간 콜트에서 일했어요. 1996~1997년 손가락 세개 모두 기타의 넥(목) 공작반에서 일하다 이렇게 됐어요. 1996년 오른손 다섯째 손가락이 처음 전기톱날에 다쳤을 때 조금만 깊이 들었으면 잘릴 뻔했습니다. 손가락이 덜렁덜렁했지만 다행히 뼈는 안 다쳐 봉합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공상처리(회사가 직접 치료비 보상)하려는 회사쪽에 맞서서 산채처리를 고집하다 그때부터 찍혀버렸어요.”


산재 다발로 1635만원 벌금 부과된 콜트 사업장

첫번째 사고로 3개월간 치료를 해야 했던 그는 다시 넥을 깎는 작업을 하다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잘렸다. 이때는 손가락 하나가 그대로 날라가서 산재처리는 쉽게 됐다. 그 다음해에도 같은 작업을 하다 왼손 손가락 잘릴 뻔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때도 회사쪽은 공상처리를 주장하다 겨우 산재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즈음 콜트공장은 산재 다발 사업장으로 찍혀있었어요. 산재처리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니까 공상처리를 강요한 거죠. 아무리 숙련된 노동자라고 우리 공장에서 넥 작업을 하다보면 잠깐만 긴장을 풀어도 순식간에 손가락이 잘려나갑니다. 사고 이후 노동부쪽의 조정으로 공작반에서 도장반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경기지방노동청도 콜트공장을 산재 다발 사업장으로 분류해서 인천북부지청과 함께 현장조사까지 나와 2007년 7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1635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건강한 노동세상’이라는 단체가 2006년 콜트악기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생산직 노동자의 40%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59%가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직업병이 의심되며, 36%가 기관지 천식, 40%가 만성기관지염으로 나타났다. 유기용제 사용이 많고 분진이 많은 기타제조 공장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방진·환기시설이 열악했다는 게 노조쪽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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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작업도중 톱날에 잘렸다 봉합수술을 받은 이동호 콜트노조 사무장의 오른손 다섯째 손가락. 정리해고 이후인 2007년 12월11일 분신한 그의 손바닥에 화상의 흔적도 보인다(왼쪽). 1997년 작업도중 톱날에 잘린 이동호 콜트노조 사무장의 왼손 중지와 검지(오른쪽). 김도형 기자

흑자기업 폐업에 “나혼자 죽어 해결될 수 있다면…” 분신


회사가 2007년 8월30일 엘렉트릭 기타(전자 기타)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부평의 콜트공장, 어코스틱 기타(통기타)를 전문으로 만드는 자회사 대전 콜텍공장 등 국내 두 사업장의 폐업신고를 했다. 현재 회사쪽이 제시한 희망퇴직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노조원 46명이 정리해고된 채 투쟁중이다.

폐업신고에 앞서 회사쪽의 정리해고 방침이 전달된 시점까지 거슬러올라가면 콜트·콜텍 노조원들의 폐업·정리해고 철회 요구는 4년10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회사쪽은 “경영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이라고 폐업 이유를 댔다. 그러나 노조쪽이 제시하는 경영실적 자료는 판이하게 다르다. 콜텍공장의 경우 1992년 설립 이후 매년 흑자를 기록했으며 2000년 이후부터는 폐업 때까지 매년 67억5천만~115억원의 당기순이익 행진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1996~2007년까지 누적 흑자만 878억원에 달한다.

콜트 공장도 회사쪽이 정리해고 수순에 들어간 2006년 8억5천만원 적자를 제외하고 92년도 이후 폐업때까지 3~37억원의 흑자를 내 1997~2005년 누적흑자만 191억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조는 “한국 공장 폐쇄는 박영호 사장이 중국과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노조활동을 무력화한 뒤 다시 공장을 열기 위한 위장폐업”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무장의 손가락은 톱날과 수술의 흔적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화상의 흔적도 눈에 띄었다. 손가락 절단이 작업중 사고였다면 화상은 스스로 몸에 불인 분신의 흔적이었다.

2007년 12월11일 밤 11시 당시 노조 대의원으로 회사쪽의 정리해고에 맞서 열성적으로 맞서 싸우던 이씨는 온몸에 시너와 아세톤 등 휘발성 물질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왜 분신했냐”고 묻자 이씨는 “죽으려고 한 거죠. 분신한 사람에게 왜 그랬냐고 하면 되겠어요”라고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뒤이은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의 반응이 이해됐다.

“회사쪽은 우리(노조원)끼리 싸워서 불을 냈다며 단순화재라고 이야기하더라구요.”

당시 회사쪽은 끝까지 간다며 노조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씨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고 한다. 독신이었던 이씨는 6~7개월동안 천막에서 혼자 잠을 자면서 약간의 우울증 증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중 그는 3개월전 분신자살한 정해진씨 분신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정해진 열사가 분신해서 문제가 해결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면서 ‘나는 가정도 없으니까 나 혼자 죽어서도 우리 문제 해결하자’ 생각에 노조 관계자들과 이야기하다가 3층 도장반에 올라가 시너와 아세톤을 들고 나와 밖에서 몸에다 뿌리고 불을 붙였어요.”

그는 경비원과 동료 노조원들이 급히 다가와 불을 꺼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는 앰뷸런스에 실려가면서도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 죽게 내버려둬라”고 외쳤다.

4개월간의 입원 치료와 세차례의 수술, 그 이후 수개월의 통원치료 끝에 다행히 얼굴에는 화상의 흔적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셨다. 그러나 허벅지 살을 이식한 손은 조직이 달라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벗겨진다고 한다. 분신 이후 연로한 아버지가 노조활동을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회사 안 천막에서 자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퇴근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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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트콜텍 노동자가 악기 전문상가인 서울 세운상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콜트·콜텍 제공

  

크레인 농성에 앞선 15만볼트 송전탑 고공노성의 절규


공장을 다시 돌려달라는 절규는 분신뿐 아니라 15만4천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위험천만한 송전탑 위 40여m 고공농성으로도 이어졌다. 2008년 10월15일 새벽 4시 이인근 콜텍노조 지회장은 김혜진 하이텍 RCD코리아 노조위원장과 함께 서울 양화대교 인근 한강시민공원 양화 지구에 있는 100m 높이 송전탑에 올라가 다음달 13일까지 한달 가까이 목숨을 건 농성을 벌였다.

“여의도 의사당과 사람들이 잘 보이는 송전탑에 올라가 시위를 해서 박 사장을 교섭 테이블에 앉히려고 했어요.”

이 지회장은 고공농성 열하루째인 11월25일부터 내려올 때까지 19일간 물과 소금만을 먹은 단식농성까지 했으나 회사 쪽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2006년 노조 설립할 때까지 콜텍공장의 사정은 콜트보다 더 열악했다고 이 지회장은 말했다.

“그냥 열악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열악했죠. 집진 시설도 잘 안돼있고, 마스크도 일반 마스크를 주고 일주일간 쓰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노조가 생기기 전까지 산재의심 환자는 많았지만 노조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했어요.”

임금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2006년 노조 설립했을 때 콜텍 일반노동자의 기본급 평균이 60만원 정도로 잔업·특근해서 90만원 정도 받았는데 세금 떼고나면 70만원 가량밖에 수중에 안들어왔어요.”

장석천(43) 콜텍노조 사무장은 “연봉 1500만~2100만원의 저임금에도 직원들은 회사가 어렵다고 군말없이 ‘새마을 잔업’까지 하고 작업중 사고가 나도 산재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15년간 단 한번도 적자 낸 적이 없다보니 경영주 입장에서 콜텍 공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면서 “박 사장이 콜텍공장에 대해 꿈의 공장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노사 양쪽 소송만 45건…고법에서 노조 승소했지만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28일 현재 1791일을 맞* 있지만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올해 기륭전자 문제가 해결되면서 콜트·콜텍 사업장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최장 장투(장기투쟁) 사업장이 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비롯된 문제가 이명박 정권 말기에 이르기까지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고등법원은 2009년 11월 노조 쪽이 제기한 해고무효소송에 대해 ‘긴박한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근로기준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부당해고’라며 노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대법원 최종 판결은 2년이 지나도록 내려지지 않고 있다.

노사 양쪽이 제기한 각종 소송이 45건이나 되는 등 노사는 사활을 건 소송전을 치르고 있는 데서도 노사양쪽의 치열한 싸움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노조쪽이 부담해야 할 변호사 비용만 9천만원이 넘는다.


박영호 사장은 지난 9월23일 국회 환경노동위 증인으로 출석해서 ‘해고 노동자를 재고용할 생각이 없느냐’는 정동영 의원(당시 민주당·현 통합민주당)의 질문에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정상 가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져 공장을 가동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박 사장이 폐업 이후 한번도 제대로 노사협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인근 지회장은 “박 사장은 노동조합을 너무 싫어해 노조를 정리하기 위해 국내 사업장을 폐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희용 콜트콜텍 이사는 28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노조쪽이 대화를 요구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는 있다”면서도 “기계가 다 멈추고 단전단수가 이뤄졌기 때문에 공장을 재가동시킬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내공장 폐업이후) 고가제품의 오더는 다른 경쟁업체에게 다 빼앗겼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폐업철회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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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혀 기타를 칠줄 모르는 기타제조업체 콜텍 해고노동자 4명이 기타를 배워 콜밴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지난 21일 홍대 빵클럽에서 데뷔 공연을 벌이고 있다. 사진 콜텍노조 제공

  

벼랑끝으로 내몰린 생계…일용직·식당 일로 전임자에 십시일반


끝이 보이지 않는 ‘장투’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생업 대책이다. 콜텍 노조의 경우 정리해고 상태인 26명 가운데 18명이 건설현장 일용직, 식당 접시닦기 등 허드렛일 하면서 근근히 버티고 있다. ‘생계투쟁’에 나선 이들이 벌어들인 적은 수입중 매달 7만원씩 거둬 나머지 8명의 활동비와 생계비로 십시일반 보태고 있다.

콜트 노조도 비슷한 상황이다.

“노조에서 산들바람 고추장을 만들어서 민주노총 조합원 등에게 파는데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않아요.”

이인근(46) 콜텍노조 지회장의 경우 부인이 화장품 방문 판매로 남편 대신 고2 딸, 중3 아들을 포함해 4인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다.

방종운(53) 콜트 노조 지회장도 간병인을 하는 부인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집 사람이 그래도 저 힘들 때 대화를 많이 해주고 해서 전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면서 “두 아이들은 대학 등록금을 못대주었는데도 제 스스로 벌어서 대학졸업하거나 재학중이어서 대견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휴’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긴 침묵끝에 “노조 전임자들한테 전임비도 제대로 못챙겨주는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프다”라고 말했다.

콜텍 노조원 임재춘(50)씨도 올해 대학 4년생인 큰 딸의 학자 대*금이 3천만원이나 쌓여 있는 것이 큰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1993~1994년 미국의 명품 기타제조사인 펜더사에 1년간 연수까지 다녀왔지만 회사쪽은 그에게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기타 장인들도 다 뿔뿔히 흩어졌어요. 펜더 등 세계적인 명품 업체로부터 주문을 받아 한대에 500만원짜리 고가제품도 만들었는데 공장을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옮긴 이후에는 중저가 제품만을 만든다고 하네요. 이 사람들 먹고 살게 해줬어야 하는데 1명인가를 제외하고 전혀 고용승계가 안됐어요. 나이 50 먹어 주머니에 돈 떨어지니까 서글프더라구요.”

장석천(43) 콜텍 노조 사무장은 아직 노총각이다. “직장도 없는데 어떤 처자가 좋다고 하겠어요”라면서 씁쓸히 웃는다. 장 사무장은 가장 힘든 때는 “돈 10원 때문에 조합원들끼리 의견충돌이 생기는데도 내가 해결해줄 수 없을 때”라면서 “그렇지만 조합원들도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원망을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콜트·콜텍과 닮은 꼴 한진중은 먼저 해결됐지만

얼마 전 극적으로 해결된 한진중공업 사태는 콜트·콜텍과 닮아 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 309일 고공농성보다 3년 앞서 이인근 콜텍 노조 지회장의 송전탑 농성이 있었다. 희망버스라는 새로운 노동운동과 연대한 새로운 시민운동이 한진중 사태의 극적 타결을 앞당겼다면, 문화연대 소속 인디 음악인들이 3년전 전부터 매주 마지막 수요일 홍대 클럽 빵에서 무보수로 콜트·콜텍 지원 콘서트를 열고 연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영화감독 김성균씨는 자비를 들여 콜트·콜트의 기타제조 노동자들의 현실과 해외 유명 록그룹의 연대움직임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타이야기>와 <꿈의 공장>을 만들어 새로운 운동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한진중 사태와 관련해 희망버스를 기획한 시인 송경동씨가 이에 앞서 콜트·콜텍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콜트·콜텍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타회사이다. 30년 동안 기타를 만들었고, 세계 기타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이름난 회사이다. 깁슨, 알바네즈, 펜더 등 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3분의 1을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만들어 왔다. <월간조선>이 선정한 50대 알짜기업 순위 41위인 대표이사 박영호는 재벌순위 120위 천억대 부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공장을 닫았다.”

한진중과 콜트·콜텍 경영진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각각 필리핀 수빅만, 중국·인도네시아로 이전하면서 정리해고가 시작된 점도 비슷하다.


“한진중 먼저 해결된 것, 착잡함보다는 위로감”

그렇다면 한진중과 달리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의 심정은 어떨까?

“글쎄 착잡한 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렇지만 착잡함보다는, 콜텍콜트 노동자들이 희망버스 1~5차까지 탑승하고 많은 사람들이 연대해서 한 사업장이라도 정리했다는 점에서 위로감을 많이 느낍니다. 내가 먼저 시작했는데, 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먼저 해결한 것은 오히려 천만다행이죠.” 이인근 콜텍노조 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방종운 콜트 노조지회장은 2010년 7월 일본의 후지록 페스트벌에 초청받는 등 6차례의 해외원정 투쟁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본 듯 했다. “갈 때마다 음으로 양으로 저희를 뒷바라지 해주는 것을 보고 노동자는 국적을 떠나 하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세계화 시대이니만큼 이제는 국제연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언젠가 한국에 와서 부당노동행위 문제를 호소하지 않겠어요. 그땐 적극 도와야죠.”


“기타는 해방의 수단”…기타 배워서 밴드결성한 콜텍노동자


해외 원정 투쟁 중 만난 많은 유명 록 음악가들이 콜트·콜텍 사태에 관심과 지원을 표명해준 것도 큰 힘이 됐다.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 ‘NAMM 쇼’(남쇼)에 갔을 때 세계적 록그룹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TM)’의 톰 모렐로와 남쇼의 공식 초청홍보대사인 피닉스 밴자민 등은 공식 지지선언과 공연에 함께 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자의 아픔이 서린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톰 모렐로는 “기타는 착취가 아니라 해방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타는 해방의 수단이 되여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은 모두 기타를 칠 줄은 몰랐다. 이제 그들도 ‘해방의 수단’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21일 홍대 클럽 빵에서는 뜻밖의 무대가 펼쳐졌다. 인디음악인 두팀의 공연이 끝난 뒤 콜텍 노동자로 구성된 4인조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콜텍 지회장인 이인근씨가 기타와 보컬, 사무장 장석천씨가 기타, 김경봉씨가 베이스, 임재춘씨가 타악기를 맡았다.

문화연대 소속 인디음악인들로부터 기타 등 악기 다루는 법을 두달간 배워 ‘이씨 니가 시키는대로 다할줄 아느냐’를 불렀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 몸버리고 속버리고 일했는데 / 이제와서 필요없다 / 이제와서 나가라니 웬말이냐 / 박씨 니가 시키는대로 다 할줄 아느냐” 문화노동자 소속 싱어송라이터의 원곡에서 이씨를 박씨(콜트콜텍 사장)로 바꿔서 불렀다.

“투쟁을 하면서 기타를 만든다고 하니까 그럼 기타칠 줄 아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한명도 기타 칠 줄 아는 사람이 없는거예요. 투쟁이 길어지다보니 즐기는 차원에서 ‘콜밴’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공연을 직접 해보니 너무 좋더라구요.”

이씨는 다음번 공연에서는 두 곡에 도전해보고 싶다.


부평/글·사진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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