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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배신자가 됐다.
작성자 조합원
댓글 1건 조회 3,799회 작성일 200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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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배신자"가 됐다

[월간말] 이랜드 일반노조가 진보신당으로 가기까지

박미경 / 전 매일노동뉴스 기자


이것은 ‘전쟁’이다. 2007년 6월 30일 이후, 벌써 9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싸움을 건 쪽은 회사였다. 애당초 노조나 회사나 싸움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눈치다. 그러나 ‘장기전’이 됐다. 장기전은 보급과 사기를 요구한다. 회사에게 보급이란 현금유동성이고 사기란 여론의 침묵이다. 반면, 노조에게 보급이란 생계유지이고 사기란 여론의 격려다.

2006년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합병하면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는 이랜드 일반노조로 통합됐다. 당시 조합원 수는 1천50여 명. 1천여 명에 달하는 절대다수 조합원이 까르푸 출신이다. 합병 뒤 까르푸 브랜드는 홈에버로 바뀌었다. 홈에버 노동자들의 1/4 가량이 조직됐다. 유통업 노동자의 조직률이 낮은 것에 비하면(전비연의 비공식 추계에 따르면 유통업 노동자의 조직률은 1% 미만이다), 홈에버 노동자들의 조직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지난해 조합원들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직률이 바탕이 됐다.

파업 초기 참가했던 조합원들 가운데 200여 명은 일찍 떠났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수도 9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싸움이 해를 넘기면서 ‘똘똘 뭉쳐 투쟁하던’ 300여 명의 핵심 조합원들 가운데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52명의 조합원 가운데 51명이 파업에 나섰던 홈에버 면목점 분회의 경우, 30명이 파업대오를 지키다가 지난 연말 11명이 파업을 접고 회사에 복귀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와중에서 22명의 동지 들이 해고됐다. 노동계에서 엽기적이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랜드의 인사노무정책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적은 숫자였다. 이 대목과 관련, 이랜드 노조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여론도 노조에 동정적이었구요.” 회사는 장기전을 선택했고, 당연히 조합원 전체를 공격하는 자충수는 피했던 것이다. 회사는 조합원들에게는 복귀를 종용하는 한편, 보수언론에게는 ‘기업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양동작전에 나섰다. 여름에 시작한 싸움이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었다. 기온이 내려가는 만큼 여론도 식어갔다. 보급과 사기의 두 측면에서 노조의 열세는 날이 갈수록 완연해졌다. 그들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방법이 없다! 국회의원이라도 해 보자!

2월 28일은 노조 간부들이 참석하는 쟁의대책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김경욱 이랜드 노조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을 제안했다. 그것은 김 위원장의 아이디어였다. 쟁의대책위원회가 열리기 며칠 전, 김 위원장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 홍윤경 사무국장 등 노조 간부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리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전술은 ‘기발한 아이디어’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은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홍윤경 사무국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김 위원장의 전언이다.

과거의 예를 보더라도(멀리는 대우자동차의 송경평, 가깝게는 현대자동차의 정갑득), 단위노조의 총선 후보 전술 구사에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국회의원 만들려고 투쟁했느냐’는 볼멘소리부터, 정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정세 인식과 투쟁노선의 차이가 빚어낼 불협화음과 불신의 벽까지. 그러나 김경욱 위원장은 단호했다. 김 위원장은 ‘나는 현장을 맡고, 후보는 다른 사람을 내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내심 이 수석부위원장을 점찍고, 그를 설득했다. 김 위원장은 마침내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의 동의를 얻어냈다. “조직이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 이 수석부위원장은 김경욱 위원장의 고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날 쟁위대책위원회는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 안건을 조합원 총회에 부치기로 했다.

다음날 조합원 총회가 열렸다. 쟁의대책위원회 바로 다음날 총회를 소집한 것은,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전략공천명부 확정일이 3월 2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었다. 김경욱 위원장이 제안 취지를 설명했다. “총선 때 이랜드 일반노조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우려와 비판도 많습니다. 현장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가운데 비례대표 높은 순번을 주는 쪽으로 출마시켜 당선 가능성이 확보되면 회사에 압박이 될 것입니다.”

제안 취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김경욱 위원장의 아이디어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당이 이미 분열된 상황에서, 김 위원장과 이랜드 노조에게는 ‘어느 당이냐’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총회에서는 ‘어느 당이냐’는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조합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노조 간부가 국회의원이 되는 게 조합원들에게 익숙한 것인가’였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상관없다?

사실, 조합원들에게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은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랜드 일반노조는 2월 들어 거의 매일 밤 복귀하려는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눈물의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오간 문답은 항상 똑같았다. “대체 끝이 어디냐?”는 복귀 조합원들의 물음과 “총선 때까지 딱 두 달만 버티자!”는 위원장의 대답. ‘총선 때까지 버티자’는 것이, 설마 이랜드 조합원들에게 총선 선거운동 하자는 이야기였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례대표 후보 전술이었다.

조합원들의 말문이 열렸다. 한 분회장은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회사가 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찬성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또 다른 조합원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9명이 있어도 비정규법 못 막았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찬반양론이 나오자, 조합원들은 간부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주문했다. 분회장들이 나섰다.

양미경 분회장(일산 홈에버)은 “출마하면 언론이 다시 우리를 주목할 것”이라며, “국회의원이 됐다고 해서 우리 세상이 될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문제 해결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찬성 의견을 냈다. 강혜정 분회장(분당 야탑 홈에버)은 고개를 저었다. “언론에 나와도 해결된 건 없었다. 연대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에 서면 안 된다.” 장석주 노조 지도위원 역시 “비정규직 투쟁단위들을 모아 연대투쟁을 강화하자”면서 후보 전술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정서는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였다. 황은영 분회장(면목 홈에버)의 “때려 부수는 폭력행위 같은 것 말고는 다 해 봤다”, “이제까지 안 해 본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을 우리 투쟁의 돌파구로 삼자”는 발언이 나오자, 조합원들의 박수소리가 총회장을 흔들었다.

이날 총회는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을 ‘조직적으로 정하기’로 하고, 다음 총회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이 안건에 90% 이상의 조합원이 찬성했다. 총선 비례대표 후보 전술은 향후 이랜드 일반노조의 명운을 넘어 어쩌면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안건이었다. 김경욱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지도부는 제안한 그 자리에서 찬반투표로 결정짓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다음 총회에서 찬반투표로 결정하기 전에 만약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2번을 준다’면 그것을 안건으로 찬반투표를 실시한다는 게 지도부의 복안이었다.


이랜드, 기륭, KTX, 그리고

이날 총회에 참석한 조합원은 100여 명이었다. 900여 명의 조합원 가운데 100여 명. 이 숫자는 이들이 ‘몰릴 대로 몰려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정확한 수치였다. 절차와 형식을 제대로 갖춘 총회가 아니었다. 후보전술을 제안한 김 위원장이 직접 사회를 맡았고, 전술이 결정되기도 전에 위원장의 지명에 의해 후보가 정해졌으며, 조합원들의 대부분은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정보가 없었다. 어쩌면 ‘총회꾼’들이 절차상의 하자를 들어 난리법석을 피울 만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위험하지만 비례대표후보 전술이라도 해 보자”는 김 위원장의 제안에, 조합원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착했다’. 이날 총회가 끝난 뒤 이남신 수석부워원장은 “국회의원이 되어 우리 문제를 풀려면 정말 어려울 텐데 짐을 지우기 안 됐다”는 조합원들의 따뜻한 위로를 들었다.

한편,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은 29일 총회가 열리기 전 며칠 동안 노조 외부의 비정규 활동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김주환 한국비정규센터 부소장은 “힘이 들더라도 투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면서, “힘들게 투쟁하는 사업장이 이랜드 일반노조만이 아니다”는 등의 이유로 후보 전술을 반대했다. 전비연 등 다른 비정규 활동가들의 의견도 대동소이했다. 심지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짓”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이랜드 일반노조의 태도가 확고부동하다는 게 확인되자, 몇몇 비정규 활동가들은 “정 후보전술을 쓰려면 민주노동당이 낫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조언하기도 했다. “진보신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가 당선 가능성이 높다.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을 상급단체로 하고 있는 데다, 비록 분당 사태가 있었지만 이랜드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도의를 지킬 필요가 있다.”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의 생각도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경욱 위원장의 판단도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미 민주노동당 주변에서는 혁신비대위가 발표한 비례대표 전략공천 예비후보에 포함된 이랜드 일반노조, 기륭전자, KTX 등은 ‘들러리’일 뿐이고, 이미 전국민주노조연합의 홍희덕 위원장이 내정됐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홍희덕 위원장은 민주노총 내에서 ‘국민파’로 알려져 있다.


“저희를 선택해 주십시오”

3월 1일 저녁 6시, 김경욱 위원장과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당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시간 전 그들은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의 연락을 받았다. 비대위원들이 비례대표 전략공천 후보를 면접하는 자리였다. 비대위원들 앞에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이랜드 일반노조의 비례대표후보 전술이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 민주노동당이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된 이랜드 일반노조의 투쟁을 받아 안고 우리를 선택해 주십시오.”

어쩌면 구차한 순간이었다. 지난 4년 동안 민주노동당 의원단 10명 가운데 대중투쟁의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전사’한 이는 없다. 의원직 상실이라고 해봐야, 선거법으로 걸린 조승수 전 의원과, 분당을 주도한 심상정, 노회찬 전 의원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직이 ‘꽃방석’이 됐다는 사실을 뜻했다. 과거 마창노련 때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당시 노동조합 위원장직은 ‘감옥행’을 의미했다. ‘일하는 사람의 정당’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직이 당내에서 시샘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제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대놓고 ‘내가 비례대표 하겠소’라는 말을 못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든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비대위원들 앞에서 “저를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시켜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다니.
‘월드컵점에서 농성할 때만 하더라도, 저이들은 우리에게 미안해했는데….’ 마치 칼날을 숨긴 듯한 야속한 질문들이 나올 때마다 이 수석부위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강국면에 접어든 투쟁이라고요?”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는 그들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비대위에 수혈된 박승흡 비대위원(대변인 겸임)과 박미진 비대위원을 제외하면, 당초 이랜드 일반노조를 전략공천명부에 진지하게 고민한 비대위원은 없었다는 게 비대위 안팎의 증언이다. 면접이 시작되기 전, 비정규직에 할당된 비례대표 2번으로 홍희덕 위원장을 점찍었던 비대위원은 일곱명의 비대위원 가운데 다섯명이었다. 그런데, 면접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사실, 홍희덕 위원장이든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든 민주노동당의 ‘싸우는 의원단’으로 부족함이 없다. 한 비대위원이 이 두 후보를 모두 전략공천 하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다. 결국, 선택은 ‘정파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분식하기 위해서는 ‘로직(논리)’이 필요했다.

이날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에서 일부 비대위원들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비례대표 2번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으로 다음의 사항들을 지적했다. △한 단위노조의 투쟁이라는 점 △하강국면에 접어든 투쟁이라는 점 △과도한 투쟁에 대해 국민 정서가 좋지 않다는 점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비정규직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 △특히, 이 수석부위원장이 대통령후보 당내 경선 때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 등이다. 이것은 ‘떨어뜨리려는’ 논리였지, ‘붙이기 위한’ 논리는 아니었다.

반박이 이어졌다. △현재 비정규 투쟁의 상징이라는 점 △국민 정서를 염려하지만 대중투쟁 가운데서도 층위를 두어 당이 확실히 나서야 하는 투쟁은 끝까지 지지해야 한다는 점 △이랜드 일반노조만이 아니라 비정규운동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점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심상정 후보를 지지한 것은 분당 이전의 상황이라는 점 등이 고려돼야 한다는 게 그것이었다.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고, 표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 비대위원은 ‘홍희덕 위원장이 2번이 되지 않으면 사퇴하겠다’는 카드까지 꺼냈다.

다음날인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는 비례대표 2번에 홍희덕 위원장을 ‘전략공천’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당일 저녁 10시까지도 일반 당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당초 혁신비대위는 3월 2일까지 전략명부 공천을 끝내겠다고 말해 왔다).


‘배신’은 꼬리를 물고

3월 3일 오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후보 전략공천자 명단이 공개됐다. 하루가 지난 뒤 이랜드 일반노조의 조합원 총회가 열렸다. 총회에 앞서 만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우리 이랜드 일반노조를 선택해 달라고 확실하게 밝혔고, 만약 되지 않을 경우에 우리 조합원들이 받을 상처까지 헤아려서 판단해 주시라고까지 호소했는데…. 어쨌든 민주노동당에 할 만큼은 했다.” 옆에 있던 한 조합 간부는 얼마나 답답했던지 “비대위가 ‘국민파’ 밀어준 거죠?”라며, 아무런 ‘빽’도 없는 기자에게까지 물었다. 이 하소연에는 ‘우리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좌파’라서 안 된 거죠?’라는 물음도 포함돼 있다. 물론 ‘정답’은 없다.

그러나 ‘심증’은 있다.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는 전략공천명부 확정을 위해 진행한 회의의 회의록을 만들지 않았다. 비대위의 다수가 ‘국민파’라서 ‘국민파로 분류되는’ 홍희덕 위원장을 ‘낙점’했다는 당 안팎의 문제제기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비대위는 ‘물증’을 남겨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믿어달라고 당원들에게 주문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한 답이 비례대표 후보 찬반투표의 투표율이다. 그것은 비단 ‘국민파’에 대한 호불호 문제만은 아니었다. 특히 수도권지역 당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지난 9개월 동안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들과 ‘함께 싸운’ 사이였던 그들에게, 이남신 예비후보의 탈락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배신’은 꼬리를 물게 되어 있다. 애초부터 이랜드 일반노조는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당선 가능성이 높은 번호를 준다면’ 어느 곳이든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김경욱 위원장은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와 면접 자리에서 3월 4일 조합원 총회에서 찬성이 나올 것을 담보할 수 없다고 밝힌 터였다. 그리고 이것이 혁신비대위측이 밝힌 이남신 예비후보 낙천의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다. 과연, 혁신비대위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랜드 일반노조는 진보신당의 문을 두드렸다.


조합원들이 가장 괴롭다

조합원들은 거침이 없었다. 황은영 분회장은 “당연히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2번을 줄 줄 알았다”면서, “민주노동당이든 민주노총이든 그동안 우리더러 비정규운동의 선두주자라고 했고, 또 국민들의 관심도 많이 받았으니까요”라고,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월드컵점의 한 조합원은 “욕심은 없다”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우리(월드컵점) 투쟁지원 해주던 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 위원장이 다 탈당했고, 우리도 비례대표 떨어지고, 그럼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 서운한 감정은 아직 상처도 아니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에서 낙천하고, 진보신당으로 가면서 앞으로 발생할 수많은 일들에 비하면….

3월 4일 이랜드 일반노조의 총회가 열렸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의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찬반투표가 예상됐던 이 총회가, 진보신당을 염두에 둔 비례대표 후보 전술 찬반투표 자리가 됐다. 회사에 파업 조합원을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며 ‘최후의 한 방’으로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을 제안한 김경욱 위원장은 ‘진보신당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노심초사 한 사람은 비례대표후보 당사자인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었다. “조직의 결정에 따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으로 비례대표 후보를 내는 것은 지도부나 조합원이 예측하는 이상으로 후폭풍이 따를 것”이라며, 조합원들에게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 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얼굴은, 3월 1일 민주노동당 혁신비대위와 면접 자리 때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이날 당산동 소재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열린 총회에 직접 나온 수도권 조합원은 96명. 하루 전날 총회를 각 지역에서 열었던 울산과 순천(발표는 수도권 조합원의 투표가 끝난 뒤)의 조합원은 각각 24명과 19명으로, 모두 139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가했다. 결과는 찬성 83표, 반대 47표, 기권 9표. 지난 29일 총회 때 조합원들은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을 총회 안건으로 올리는데 90% 이상이 찬성했다. 그만큼 조합원들은 괴로웠다. 임희석 조합원(안양 홈에버)은 “29일 총회 때는 찬성했지만 이번에는 기권했다”며, “이후 몰아칠 후폭풍이 걱정이 되어서”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총회에서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삐쳐서 앞으로 도와주지 않을 것 아니냐”는 조합원들의 걱정이 꽤 나왔다. 그때마다 김경욱 위원장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그럴 리 없다”고 조합원들을 다독였다.


너무나 일찍 꺼진 이랜드‘신화’

하지만 상황은 이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움직인다. 민주노총은 분당 사태가 현실화되자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더 강화하고 있다. 총연맹과 이랜드 일반노조의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은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진보신당의 비례대표후보가 되는 게 “조직적 지침에 맞지 않다”면서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이랜드 일반노조는 3월 9일 일요일, 긴급 조합원총회를 열어 총선 비례대표후보 전술 ‘폐기’ 안건을 놓고 또 다시 찬반투표를 해야 했다. 조합원 74명이 참석한 가운데 ‘폐기’에 찬성하는 조합원은 26명, 반대하는 조합원은 39명, 기권이 9명이었다.

세 번에 걸친 총회. 90% 찬성에서 간신히 과반을 넘기는 상황까지 왔다. 총회를 거듭할수록 참석 조합원들의 수는 줄어들고, 반대와 기권 표가 늘어났다. 그런데 오히려 찬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거세지고 높아진다. “우리가 한다는 데 왜 말리는 거야?” 3월 4일 총회 때만 해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우리를 배신자로 보지 않을까”라며 걱정하던 조합원들이 9일 긴급총회에서는 “(우리가 조직적 지침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우리를 도와주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분당으로 민주노동당의 총선 지지율이 떨어질까 염려하던 조합원들이 “우리가 분당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분당은 자기네들이 해놓고…”라는 정도로 격해졌다.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비대위원들에게 언급했던 “우리 조합원들이 받을 상처”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역경으로 세상에 대한 동정심과 연대가 깊어지는 게 아니라, 거꾸로 복수심으로 상처가 패이고 감정의 골이 갈라지는….

이랜드 일반노조의 비례대표후보 전술은 과연 무엇을 남긴 것일까. 결과적으로 볼 때, 이랜드 일반노조의 선택은 민주노동당의 어떤 측면(성향)을 폭로한 셈이 됐다. 마찬가지로 이 선택은 이랜드 일반노조 지도부의 어떤 측면(성향)을 드러낸 꼴이 됐다. 진보신당은 이 와중에서 이삭을 주웠을 뿐이다(진보신당은 이랜드 일반노조의 ‘민주노동당행’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한 바 없다). 이 과정에서 지난 9개월에 걸쳐 힘없는 노동자들의 말없는 성원을 받았던 헌신적인 대중투쟁의 좌표는 사라져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김경욱 위원장의 ‘당선 가능성이 있는 국회의원 후보를 냈으니 딱 두 달만 기다려 보자’는 공언대로 총선 기간 동안 회사에 조합원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다행히 이남신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총선 기간’은 ‘임기 동안’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남신 후보가 당선이 되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총선 기간’ 동안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지 않으면 이 전술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이랜드 일반노조의 선택은 절박했지만 (진보신당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후폭풍’을 예상치 못했다. 민주노동당의 선택은 (이랜드 일반노조가 진보신당으로 갈 수도 있다는) ‘후폭풍’은 예상했지만,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랜드 일반노조의 ‘신화’, 그것은 너무나 빨리 꺼져버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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