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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 무력화 ?(퍼옴)
작성자 조합원
댓글 2건 조회 3,922회 작성일 20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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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운동 무력화’?

[월간 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보궐선거 격돌

박미경 매일노동뉴스 기자

해마다 봄이 되면 창원을 가로지르는 창원대로에는 벚꽃이 활짝 핀다. 공교롭게도 올해에는 창원의 벚꽃이 피고 지는 때와 총선 선거운동기간이 같았다. 20년 전 마창노련의 노동자들이 사업주와 경찰에 맞서 불붙인 드럼통을 굴리던 창원대로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함박 웃을 수 있었다.

경남 창원을 선거구는 울산 북구와 함께 이른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상징이다. 울산 북구는 연이은 패배로 그 성가가 추락했지만, 창원을은 권영길의 재선으로 민주노동당의 체면을 살려줬다.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창원의 노동자들이다. 연대투쟁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마창노련 노동자들 말이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고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노동자들은 매우 곤혹스런 상황을 맞게 됐다. 이들은 오는 6월 4일 실시되는 창원시 4선거구 경남도의원 보궐선거에서 같은 민주노총 조합원인 민주노동당 손석형 후보와 진보신당 이승필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언론노조 출신 권영길 후보를 두 번이나 당선시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염을 토한 이 노동자들이 정작 자신의 ‘기름밥 동지’를 찍을 때는 갈라져야 한다. 불꽃이 사그라진 뒤 창원대로에 만개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진보정치의 성지로

창원에서 ‘노동자 후보’가 최초로 출마한 것은 1991년 6월 20일에 실시된 광역의원선거다. 당시 국민연합 마창본부는 지역의 노동단체, 시민사회단체, 재야단체와 함께 범민주단일후보추대본부를 구성했지만 단일후보 추대에 실패했다. 하지만 마창노련은 운영위를 열어 독자출마를 추진했고, 이에 따라 (주)통일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역임한 이봉균 후보가 ‘마창노련 후보’로 창원 제4선거구에 출마한다. 후보는 모두 3명으로, 이색적이게도 ‘한국노총 후보’(서석교 대우중공업노조 창원지부장)가 출마했다. 이 후보는 6천895표를 얻어 1만824표를 얻은 민자당 후보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한국노총 서 후보는 5천249표를 얻었다.

이어 1992년 14대 총선에서 마창노련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대림자동차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권대운 후보가 출마한다. 마침 이때 창원시가 갑과 을로 분구됐다. 하지만 창원을에 출사표를 던진 권 후보는 3천595표를 얻는 데 그쳐 4.7%의 득표율을 기록한다. 직전의 광역의원선거 때보다 표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어쨌든 이것이 창원을 국회의원선거에서 노동자 후보가 얻은 최초의 표였다. 이 선거의 유효표는 7만6천484표였고, 이 가운데 5만6천여표를 민자당과 국민당 후보가 가져갔다.

이때만 해도 마창노련의 조합원들은 이른바 ‘정치세력화’를 그리 탐탁찮게 여긴 듯하다. 실제로 민중당이 이 선거에서 후보를 냈지만 결국 선거운동을 접어야 했다. 권 후보의 출마 또한 ‘정치세력화’를 노렸다기보다는 당시 대림자동차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뚫기 위한 ‘투쟁전술’의 일환이라는 성격이 컸다.

어느 현장에 구사대가 떴다는 기별만 돌면 순식간에 2천여명이 넘는 정당방위대원들이 모였다는 ‘전설의 마창노련’이 1995년 12월 16일 해산하고, 민주노총의 시대가 왔다. 노동자 후보의 출마는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1995년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 창원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동료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중앙’ 차원에서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끊임없이 논쟁되고 모색되고 있었다. 1997년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권 후보는 창원을에서 4천823표를 얻었을 뿐이고, 이 역시 지난 1991년 마창노련의 이봉균 후보가 얻은 표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러나 권영길의 출마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노동자 후보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가 있지만, 창원을의 노동자들이 ‘친노동’ 후보를 당선시킨 첫 번째 승전보가 다음해인 1998년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울려 퍼졌다. 가톨릭 노동사목 활동을 했던 정동화 후보가 노동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335표차로 창원시의원(사파동)에 당선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학생운동 출신인 이재구 후보와 여월태 후보 등도 선전해 몇 년 뒤 민주노동당의 ‘승리’를 예고했다. 하지만, 노동자 후보는 없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선언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중심이 돼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결의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의 유일한 계급정당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권영길은 창원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원을은 울산 북구와 함께 전국에서 노동자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두 지역구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오랜 망설임과 불안을 접고 창원을의 노동자들은 권영길 후보의 당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결과는 5천여표차의 패배. 하지만 권 후보가 얻은 3만6천579표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민주노동당은 당 해산의 아픔을 딛고 전진을 계속한다.

2002년 실시된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의 헌법소원으로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최초로 도입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일약 3당으로 올라설 기틀을 마련한다. 창원에서도 창원시장선거에서 이재구 후보가 2만5천516표를 얻어 15.28%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경남도의원선거 창원시 4선거구에 출마한 최은석 후보는 1만6천348표를 얻어 1위와의 표차를 7천여표차로 줄였다. 창원시의원선거에서는 창원을 소재 8개 선거구에서 3명이 당선됐다.

특히 이 선거에서 마창노련 의장직무대행을 역임한 이종엽 후보가 가음정1 선거구에서 1천4백여표차로 승리해, 마창노련 조합원 출신으로는 첫 시의원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창원에서 얻은 광역의원 정당명부비례대표 득표는 3천531표로, 득표율은 18.27%였다. 승리는 이어졌다. 2004년 17대 총선, 권영길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1만2천여표차로 따돌리고 마침내 원내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때부터 창원을은 울산 북구와 함께 진보정치의 ‘성지’로 받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웬일인지 창원을에서 민주노동당의 성장세는 정작 원내 진출이 이루어진 뒤부터 둔해진다. 이미 울산 북구에서는 2005년 10월의 보궐선거 때부터 김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창원을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결과는 매우 암담한 것이었다. 창원시장선거에서 손석형 후보가 3만6천519표를 얻어 지난번 선거 때보다 1만여표를 더 얻었다지만, 마창노련 의장 출신인 이승필 후보가 출마한 경남도의원 창원 4선거구에서 패배했다.

더 아팠던 것은 기초의원선거 결과였다. 당초 15개였던 창원시의원 선거구가 8개로 통폐합돼 8개였던 창원을 소재 선거구가 4개로 줄어 선거구별로 2~3명씩 당선자를 뽑게 되었는데도, 민주노동당은 이 지역에서 2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이것은 이른바 ‘계급투표’가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난해 12월의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창원시 전체에서 1만8천327표로 득표율 7.9%라는 초라한 성적을 얻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뒤 창원을에서 치러진 선거는 모두 아홉 번이다(두 번의 기초의원 보궐선거 포함). 이 가운데 대통령과 경상남도지사 및 창원시장,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광역의원 및 비례대표 기초의원을 제외하면 총 당선자 수는 26명으로, 민주노동당 당선자 수는 모두 7명. 여기에서 정동화, 여월태 당선자와 권영길 당선자(2회), 그리고 당선 뒤 제명된 이종수 당선자(대우자동차 출신)를 빼면, 노동자 출신은 이종엽 당선자(2회)뿐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상징처럼 여겨진 창원을의 노동자 의석 점유율은 겨우 7.6%(2/26)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광역의원도 아닌 시의원으로, 그나마 이 숫자도 여성할당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의문스럽다.

손석형과 이승필

앞서서 싸운 노동자들은 훈장을 단 만큼 약점이나 상처도 많다. 여기 소개하는 두 노동자도 그렇다. 두 사람 다 ‘옛날 이야기는 왜 꺼내냐?’는 눈치다. 하지만 훈장이 그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듯 약점이나 상처도 우리 모두의 것이다.

손석형은 1987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노동자들의 ‘스타’였다.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는 노동자 1천5백여명(당시 조합원 4천여명)의 투쟁을 이끌었다. “노동조합 활동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손석형은 4박5일의 파업농성을 진두지휘, 사장과 마주 앉아 해고자 복직까지 포함된 노동자들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나이 서른 손석형은 처음 인생의 쓴맛을 본다. 노동조합 규약에 위원장 출마자격을 ‘입사 3년 이후’로 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있었는데, 자격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나자 바로 구속이 된 것이다. 손석형은 1985년에 입사했다. 옥중출마 했지만 회사의 압력으로 부인이 눈물을 머금고 출마사퇴서를 썼다.

1988년 4월, “부서에서 아무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대의원이 된 게 전부”였던 57년 닭띠 이승필은 대림자동차노동조합의 첫 직선 위원장이 된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한 일이 마창노련 가입이었다. 이것이 바로 ‘감옥의 추억’의 시작이었다. 조합원 1천여명의 평균연령이 21세. 마창노련 연대투쟁의 선봉에 선 그들의 구호는 “같이 죽자!”였다. “89년에 경찰에 다섯 번 연행됐는데, 그때마다 우리 조합원들이 파업해서 풀려났습니다.” 20년 뒤 경남도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진보신당 이승필 후보의 구호는 ‘필승! 이승필!’. 앞부터 읽어도 뒤부터 읽어도 필승이라 누군가 머리 빠른 ‘먹물’이 그를 돕느라 만든 재담이겠지만, 20년 전의 진짜 ‘필승! 이승필’의 눈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은 그런 말랑말랑한 게 아니다.

1990년 2월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한 노동부의 업무조사를 기점으로 이승필은 본격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떠난다. 1990년 3월 구속돼 옥중에서 조합원 95%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회사가 인정을 하지 않아 나와서 싸우다, 1992년 2월 또 구속된다. 대림자동차노동조합은 비단 대림자동차뿐 아니라 지역의 모든 회사 사업주에게는 ‘눈엣 가시’나 다름없었다. 회사는 파업을 막다 지쳐 마지막에는 ‘마창노련 의장만 하지 말아다오’라고 읍소하기에 이른다. 당시 대림자동차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70%대. 잘나가는 회사이니만치 적당히 지갑 불리고 끝낼 만도 하건만, 그 위원장에 그 조합원이라고 아예 조합원들이 나서서 이승필의 등을 떠밀었다.

1992년, 손석형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전 집행부의 사퇴로 실시한 보궐선거에 당선돼 두 번째의 위원장 생활이 시작됐다. 150여일 동안 진행된 임단협 투쟁을 성공리에 이끌었는데, 정작 문제는 바깥에서 터졌다. 한중 바로 옆의 삼미특수강이 파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역의 단체에서는 한중도 마침 임단투 기간이니만큼 함께 파업에 나서주기를 바랐다. 결국 한중의 임단협이 타결된 뒤 삼미특수강에는 공권력이 투입됐다. “아니, 그 연대투쟁에 대해 어떤 얘기도 들은 게 없습니다. 마창노련이든 경노협이든 어디서든 제안을 받은 게 없어요. 라면도 갖고 가고 밤에 지원투쟁도 가고, 경찰한테 쫓긴 삼특 동지들 우리 작업복 입고 빼돌리고 했는데….”

손석형은 92년 말 치러진 9대 위원장 선거에 도전해 다시 당선된다. 이 무렵부터 한중의 경영 상태도 호전된다. 1980년부터 1990년도까지 1983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계속 적자였지만 1991년도부터 한중의 대차대조표에는 붉은색이 사라지고 푸른색으로 채워졌다. 한중노조 역시 안정기에 접어든다. 손석형은 1996년과 1999년 두 번 더 위원장에 당선돼 모두 다섯 번 위원장을 역임했고, 1998년부터 2004년까지 3번 연임으로 민주노총 경남도본부장을 맡았다. 손석형의 ‘협상 능력’은 자타가 공인한다. “협상을 잘한다고 해서 투쟁력이 떨어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손석형은 그 말대로 1998년 한중 민영화 반대투쟁, 2000년 발전노조 투쟁으로 구속돼 다 합쳐 세 번의 ‘별’을 달았다.

1994년 7월, 이승필은 마창노련의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다음해였던가. 수배 중이던 이승필은 어렵게 만난 문성현 ‘형님’으로부터 “이제 혁명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승필은 울었다. 혁명이 안 된다니…. 그럼 우리가 창원대로에서 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혁명은 끝났지만 구속은 끝나지 않았다. 이승필은 1998년 민주노총 총파업 건으로 또 구속된다. 90년대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이승필은 2001년 초대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한다면 한다’는 금속노조의 기풍을 세우고 마음의 고향 창원으로 돌아왔다.

뉴 밀레니엄. 세상은 점점 더 평화로워지는 듯 보인다. 한동안 뜸했던 이승필은 2004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맡아 생전 처음으로 정치판에 나섰다. 문성현 형님이 도당위원장이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형님이 당대표가 되자 이승필은 부위원장을 사퇴한다. 통합 집행부를 깬 것에 대한 강한 반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이승필은 경남도당 대표를 맡게 된다. 역시 통합 집행부였다. 그런데 또 사퇴했다. 왜 그랬을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조합원들과 ‘함께 죽자’던 노동조합 활동이 “딱 체질”인 이승필에게 정치는 낯선 것이다. 이승필의 체질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전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민주노동당도 문제라면 문제다.

손석형은 이승필보다 일찍이 민주노동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손석형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창원갑에서 나서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중에 피선거권이 회복되지 않아 출마를 접게 된다. 그해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에 성공하고, 다음해에는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을 보유한 ‘막강한’ 창원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창원시장 후보로 나와 3만6천912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 이때 그가 받은 표는 직전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 후보가 받은 표보다 1만여표가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2008년 5월, 손석형은 경남도의원 창원 4선거구 보궐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섰다.

“우째 된 기고?”

“그래 됐다. 처음에 청년회에서 ㅇㅇㅇ을 나가라 카더니 내보러 나가라고 하더라.”

“우리가 언제 청년회 말 듣고 운동했나? 창원시장 후보로 나왔다가 국회의원 나간다고 했다가 인자는 도의원으로 나오면 잘하면 시의원으로 나오겠다. 그라몬 니도 끝 아이가?”

“조직에서 나가라는데 우짜겠노.”

“나도 지난번에 여기서 나온 죄로 이번에 나가라 캐서 나오는 긴데, 진보신당 경남도당 상임위원장이 도의원 후보로 나오는 기 맞나? 그래도 나오는 기다. ㅇㅇㅇ 출마했을 때 우리가 양보한 셈인데 이럴 수가 있나?”

“고마 통합하자. 니가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오면 내가 선대본부장 하께. 한번 보자.”

“만날 필요 없다. 전화 끊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힘겨루기

진보신당 이승필 후보가 화난 김에 “이럴 수가 있냐”고 말은 했지만,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승필 후보도 지난 총선 때 당 안팎에서 권영길 후보와 맞붙어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후보도 “운동의 원칙으로 따지면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출마하지 않았다. “어제 아래 봤던 사람보러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가 나가면 일반 사람들이 우리의 정당성을 인정하겠느냐. ‘꼬장’ 부리는 것으로 볼 것 아니냐. 진보신당 창당할 때 이십년 보고 생각했는데,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민주노동당 후보가 하필이면 손석형 후보인 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일까. “누가 진짜 노동자인지 노동자들에게 판단해 달라 하자”는 게 이승필 후보의 말이다.

민주노동당 손석형 후보도 같이 운동했던 사이에 “어쩔 수가 없다”고 말은 했지만, 민주노동당이 손석형 후보를 선택한 것은 당선 가능성 때문이다. 이미 민주노총 경남도본부(본부장 이흥석)은 임원회의를 통해 △보궐선거는 투표율이 낮으므로 민주노총 조합원이 출마해 계급투표가 돼야 하고 △당선 가능성과 인지도가 높아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이러한 의견을 당에 전달한 바 있다. 이흥석 민주노총 경남도본부장은 “지방선거와 다음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창원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번 보궐선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난 총선 때와는 달리 지방선거와 다음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후보를 낼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에 따르면 창원을 지역구에서 민주노총의 영향력 아래 있는 유권자는 대략 1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번 총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3천여표차로 당선된 만큼, 진보신당에서 후보를 내기만 하면 민주노동당 후보는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노동자 표가 결정적인 창원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한 하늘 아래 함께 못 사는 처지다. 결국,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는 진보신당이나 거점을 지켜야 하는 민주노동당이나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첫 번째 힘겨루기가 이번 보궐선거라는 이야기다.

분당을 주도한 이들은 이미 ‘불구대천’의 사이가 되었지만, 창원의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에는 여전히 분당 사태를 못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 금속노조 현대로템지회(지회장 남봉희)는 창원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도하는 민주노총 가입사업장으로 조합원 2천여명 가운데 2백여명이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하지만 로템지회는 이번 보궐선거를 앞두고 아직 공식적인 정치방침을 내놓지 않고 있다. 현 집행부가 진보신당에 동정적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열성 민주노동당 당원인 장명국 대의원이 전하는 현장의 분위기는 간단치 않다. “마창노련 시절을 생각하면….”

지난 총선 때 로템지회의 정치위원회는 이번 보궐선거처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일종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민주노동당 창원갑 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창원지역 금속노조 지회장 21명의 서명을 받았고(창원지역의 금속 지회장은 모두 30여명), 후보 사퇴가 이루어질 때까지 권영길 후보의 로템 현장 방문도 사실상 막았다. 이렇게 해서 로템지회는 “민주노총 조합원 권영길(민주노동당 창원을)과 최재기(진보신당 창원갑) 동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정치방침을 정했다. 2004년 총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자”는 정치방침을 정하고, 선거운동기간 내내 당원인 조합원들이 연월차를 내고는 공장 바깥으로 나가 시민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분당 사태에 대놓고 욕을 하던 조합원들은 진정하고 투표하러 갔다.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로템지회는 민주노총 경남도본부 운영위원회에 후보 단일화와 민주노동당 후보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정하지 않도록 하는 의견을 냈다. 경남도본부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후보 단일화 방안을 양 당에 제안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어떻게 해서든 출마를 해서 당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진보신당으로서는 애초부터 받을 수 없는 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일화가 어려워지면서 로템지회의 한 간부는 권영길 의원과 통화를 시도했다. 총선 때 권 의원이 직접 전화를 걸었고, 현장에 방문해서도 “통합을 위해 애쓰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화를 하지는 못했다. “바쁘셨겠지요….”

5월 16일 민주노총 경남도본부 운영위원회는 민주노동당 손석형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 로템지회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표결 결과는 14대6으로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재선에 성공한 권영길 의원은 역시 재선에 성공한 강기갑 의원과 함께 손석형 예비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20년 전 창원대로 투쟁 때 탱크를 끌고 나갈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무모했던 로템지회 조합원들은 “우째야 되노?”를 연발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창원시 4선거구(사파동, 가음정동, 성주동)의 유권자는 모두 9만여명. 민주노총 경남도본부는 이 선거구에 거주하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숫자를 3천여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두산중공업 5백여명(이와는 별도로 사무직이 3백여명 된다), 두산인프라코어 4백여명, GM대우 4백여명, 로템 150여명, STX엔진 1백여명, 동양물산, 센트럴, 세화제강, 덴소풍성, 풍산 등이 각각 50여명에서 1백여명 사이다.

그런데 이 3천여표가 모두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 투표하는 것은 아니다. 대선 직후 민주노총 경남도본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경남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35%였다. 창원을에 거주하는 조합원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고 가정할 때 창원시 4선거구에서 최소한 1천5백여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배우자나 직계가족을 합하면 그 표는 대략 4천여표 안팎이고, 이밖에도 숫자로는 잡히지 않지만 과거 마창노련 조합원이었던 자영업자나 비정규 노동자 표가 더해지고, 이 표들이 ‘새끼를 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의 최종 득표수가 나오는 것이다.

‘조직표’에서는 진보신당이 밀리는 분위기다.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의 표가 가장 많아 두산중공업 출신인 손석형 후보로서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셈이다. 이승필 후보 선대본의 김창근 집행위원장이 두산진보신당의 김창근 집행위원장이 두산중공업노조의 4선 위원장 출신이지만 후보로 직접 나선 손석형 후보를 따라잡기는 버거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은 GM대우에서도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템의 경우에는 진보신당이 약간 앞서는 것으로 지역에서는 본다.

진보신당은 ‘당세’에서도 민주노동당에 밀린다. 진보신당은 이번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인지도도 낮고, 노회찬이나 심상정 같은 스타 정치인이 출동해도 창원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다. 다만 마창노련 시절 노동자였던 자영업자, 주부, 비정규 노동자의 표는 자기들에게 더 쏠릴 것이라는 게 진보신당의 기대다. 이 선거구에 거주하는 삼미특수강 출신 노동자 가운데 5명에게 전화를 한 결과, 2명은 손석형 후보를, 3명은 이승필 후보를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여론조사 역시 손석형 후보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창원 4선거구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후보, 손석형 후보, 이승필 후보의 순으로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은 4~5% 차이로 손석형 후보와 한나라당 후보 사이에 당락이 갈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투표율이 높으면 한나라당이, 투표율이 낮으면 민주노동당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창원의 노동자들로서는 결코 유쾌한 구도는 아니다. 창원의 노동자들은 권영길의 당선에는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동료’를 광역의원으로 만들 힘도 아직은 없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손석형 후보든 이승필 후보든 이번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면 당선자는 이 지역 최초의 노동자 출신 광역의원이 된다. 마창노련으로부터 20년, ‘국민승리21’로부터 10년. 역사상 최초의 지역구 재선 진보정당 국회의원을 배출한 창원을 선거구이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이처럼 요원하다.

이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마창노련과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의 노동자들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권영길을 두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고.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민주노동당이 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공장을 뛰쳐나왔던 두 ‘호한(好漢)’으로 하여금 나이 오십줄에 국회의원도 아니고 광역의원 한 자리를 놓고 싸우도록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무력화’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창원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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