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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투쟁정신을 일깨우는 호루라기 노동자 - 배달호 열사
작성자 조합원
댓글 0건 조회 3,915회 작성일 200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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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투쟁정신을 일깨우는 호루라기 노동자 - 배달호 열사
[노동자역사 한내] 이달의 노동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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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하반기를 열사정국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열사정국은 2003년 한 해 전체였으며 그 시작은 배달호 열사였다. 2003년 새해벽두인 1월 9일 6시경 배달호 열사는 두산중공업 단조공장 쿨링타워 근처에서 분신하였다.

재산과 급여의 가압류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자신보다는 해고자와 구속자들을 더 안타깝게 여기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두산자본과 싸워 이기고자 했던 배달호 열사! 열사를 생전에 알던 사람들은 대오의 맨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던 노동자로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항상 투쟁의 전선에서 앞장섰던 열사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후배들에게 투쟁의 모범을 보여 준 진짜 노동자였다. 그가 불던 호루라기는 함께한 동지들의 투쟁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승리를 위해 진군하는 나팔과 같은 소리였다. 앞이 안 보이는 절망의 순간에 열사는 동지들에게 끝까지 투쟁하여 승리해 줄 것을 당부하며 자신의 몸을 호루라기 삼아 불어 댄 것이다. 동지들이여, 일어나 싸우라고......

배달호 열사는 1953년 10월 14일에 태어났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 1981년 1월 22일에 입사하여, 1987년 7월 설립된 한국중공업노동조합에서 1988년부터 2001년까지 6대(제2대, 7대, 11대, 12대, 13대, 15대)에 걸쳐 노동조합 대의원을 역임하고, 1995년에는 제10대 집행부 노사대책부장으로, 2000년에는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부터는 민영화 대책위원으로 1999년에는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배달호 열사는 두산중공업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2002년 두산재벌의 부당한 해고와 징계 등 비인간적인 노동정책에 맞서 싸우던 중 2002년 7월 23일에 구속되어, 9월 17일에 출소했으며 집행유예(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기간 중에 있었다. 회사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고소, 고발하여 징역을 살게 하는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열사의 집 등 모든 재산과 임금을 가압류하였고, 이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지자 배달호 열사는 생계비 충원을 위해 회사 복지기금에 대출 요구를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가압류자는 대출 불가라는 회사의 통보뿐이었다. 그 후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고 2002년 12월 26일에 징계기간이 끝나서 현장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현장에 복귀하자마자 회사에서는 단지 노조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관리자와 노무팀의 관리 대상에 올려놓고 배척과 통제, 감시를 끊임없이 진행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곁에 있던 동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어서 홀로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냈다고 한다. 회사는 노조활동 중단을 요구하는 각서까지 요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열사의 죽음은 바로 두산 자본의 악랄한 노동조합 탄압과 파괴행위에 항거한 분신이었다. 배달호 열사의 분신을 이해하려면 두산중공업 노사 투쟁과 정부의 사유화 정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 배달호 열사는 분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한 직장을 21년 다녔고, 투쟁하며 열심히 살았던 나이 쉰의 열사에게 닥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첫째, 공기업의 사유화 정책이 문제였다. 자산 가치 5조(자회사 포함)에 이르는 한국중공업을 3000억이라는 헐값에 인수한 두산재벌은 오직 돈벌이에만 급급했다. 두산재벌은 인수 후 1124명을 명예퇴직 등의 이름으로 내쫓고, 외주.소사장제 도입, 일부식당 용역화, 일방적인 사업이관(내연발전사업, 강교사업부 등) 실시, 3000억에 한국중공업 자회사인 한중DCM이 두산기계 인수, 한중 이익잉여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여 경영권 장악, 2002년 초 민주노총 투쟁 참가를 빌미로 간부와 조합원 대량 징계(201명) 등 파행적인 경영을 일삼았다.

둘째, 두산재벌의 산별노조 불인정과 노동조합 파괴공작이다. 2002년 두산중공업지회의 투쟁은 기업별노조 교섭이 아니라 금속산별노조의 교섭이었다. 두산재벌은 금속노조를 인정치 않고 10여 차례의 집단교섭에 한 차례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꾸준히 진행해 온 신노사문화정책을 바탕으로 조합원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부당노동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급기야 노동조합의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조직적으로 방해하여 노동조합이 총회 중단을 선언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해고 18명을 포함하여 620명을 징계하는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는 두산재벌의 노동조합 파괴수순이었다.

셋째, 지속적인 탄압과 손배.가압류이다. 두산재벌은 노사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이행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는 한편, 78억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조합비 뿐 아니라 개인의 재산과 급여까지 차압하여 노동자 자신 뿐 아니라 가족까지 생계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

넷째, 사법부마저 자본의 편에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이었다. 배달호 열사는 사법부가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터무니없는 실형을 선고하는 모습을 보며 법이 가진 자의 법이며 사법부가 자본의 편이라는 사실을 유서를 통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공정해야 할 사법부마저 두산 자본의 편이라고 생각한 열사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할 것인가?

이상이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 중 중심적인 것이었다.

‘죽어서도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라던 열사 때문이었나? 투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금속노조와 금속연맹, 그리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열사 배달호동지 분신사망대책위원회’는 1월 9일 분신으로부터 3월 14일 장례식까지 63일에 걸친 투쟁을 통해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키고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었으며, 금속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실감케 하였으며 해고자복직의 단초를 열었다. 열사가 바랐던 두산중공업지회의 조직력 복원은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정 부분의 성과를 낸 투쟁이었다. 열사가 지켜보는 민주광장에서 두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배달호 열사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일어날 두산중공업노동자를 기대하며... 배달호 열사의 6주기에 다시금 노동자의 투쟁정신을 생각해 본다.

관련 자료로는 배달호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 발간한 ‘열사의 뜻 이어가리라’(배달호 열사 투쟁자료집)가 있으며, 추모 노래로 ‘배달호 열사의 노래’(호루라기 사나이)가, 추모 시집으로는 ‘호루라기’가 있다. 유족으로는 노모(1933년생)와 부인 황길영, 두 딸이(84년생, 86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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