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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빛나는 연대의 전통 되살리다
현대미포조선 100m 고공농성 31일 의미와 과제 … 자본의 "외부세력" 논리 넘어야
용인기업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촉구로 시작된 현대미포조선 투쟁이 1월 23일 민주노총울산본부, 현대미포조선 사측, 현대미포조선 노조가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일단락됐다.
쟁점이었던 용인기업 노동자들은 2월 9일까지 정규직으로 우선 복직, 임금 등은 고법판결(조정, 합의 포함)에 따르기로 했다. 또 이홍우 동지 투신과 관련해서는 유감 표명과 산재에 준한 처리, 현장대책위로 활동한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해고·감봉·정직 등이 아닌 징계 최소화, 민형사상 책임 면책에 합의했다. 현대중공업 소각장 굴뚝농성을 벌인 김순진 동지도 해고하지 않기로 했으나 민사상 고소는 취하하지 못했다. 단, 가압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용인기업 복직투쟁 6년. 이홍우 동지의 투신 71일. 김순진, 이영도 동지의 굴뚝농성 31일만의 합의였다.
용인기업 복직 6년, 투신 71일, 굴뚝농성 31일만에
이번 현대미포조선 투쟁은 비정규직인 용인기업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에 맞선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동안 노조 대의원 대다수를 포섭해 노조와 현장을 통제해 온 현대미포조선은 이들의 투쟁이 현장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회사측은 “비정규직이 죽던 말던 무슨 상관이냐”며 중식시간을 이용한 복직요구 선전전을 이유로 중징계를 내렸다. 잔업·특근 통제, 감시와 가족에 대한 협박까지 자행됐다. 노조까지 이들의 투쟁을 노조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장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부당해고 6년, 의도적 재판지연과 복직연기, 상식적이고 당연한 복직요구에 대한 징계, 일상화된 산재은폐와 현장탄압이 이홍우 동지가 투신하게 된 과정이다. 또 그런 목숨 건 호소를 가슴에 안고 혹한의 겨울 김순진, 이영도 동지는 “꼭 살아서 투쟁하자”는 약속을 하고 100m 굴뚝농성을 시작했다. 더 이상 현대미포조선 투쟁은 울산만의 투쟁이 아니게 되었다.
현대중공업과 경찰의 방해로 최소한의 방한용품과 음식을 올릴 수 없는 상황에서 물과 초콜릿으로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를 견디는 두 동지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다”는 김진숙 동지의 말이 좀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끌고서라도 내려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투쟁을 승리하는 길만이 두 동지를 살릴 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1월 3일 패러글라이딩으로, 1월 17일 물대포를 뚫고 공수한 물품으로 두 동지들이 우리에게 투쟁할 시간을 주었다고 그나마 안도할 뿐이었다.
용산집단학살 이후 교섭에 나온 현대자본
현대자본은 현대중공업노조와 현대미포조선노조를 대리인으로 세우며 직접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투쟁, 타협은 없다는 현대자본의 강경대응에 설 이후의 투쟁계획을 요구받고 있었다. 그러나 1월 20일 용산 참사 이후 현대자본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적극적으로 교섭에 응했다. 용산 참사로 인해 ‘반 한나라, 반 정몽준, 반 이명박’ 전선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현대자본이 사태 마무리에 나선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매일 이어지는 촛불집회와 울산노동자대회, 영남노동자대회에 연대한 수많은 동지들과 이 투쟁에 고군분투한 동지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승리도 가능했다. 민주노총 대책위를 중심으로, 미포 현장에 투쟁의 본질을 알리며 회사측의 왜곡과 폄하에 맞서 투쟁한 현장대책위, 그리고 단체 및 활동가와 시민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꾸린 지역대책위의 투쟁이 있었기에 더 빛났다.
이들은 지침이 아닌, 오직 마음하나로 모였다. 출근선전전, 선전물을 만들고, 길거리 모금과 문화공연으로 시민들을 만났다.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의 힘이 바로 울산에 있었다. 이영도 동지의 말처럼 “활력을 상실한 우리 노동운동. 언젠가부터 사라진 단결과 연대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온 마음과 몸을 다했다.
여느 투쟁처럼 많이 아프고 안타깝고, 의견과 전술 등 차이가 있었지만 투쟁을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굴뚝농성 시작 후 암암리에 흘러나온 상식이하의 소문들은 무시하겠다. 또 회사의 논리만 되풀이하며 조합원을 보호할 생각은 없었던 현대미포조선노조에 대한 비판은 손만 아프니 생략하겠다)
이홍우 동지의 투신 직후, 우리 내부에서 용인기업 복직투쟁과 이홍우 동지의 투신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현장탄압에 의한 것이니 같이 묶어 가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투쟁이 분산되면 좋아할 곳은 현대자본 뿐이다. 회사측은 이홍우 동지의 투신을 개인 문제로 폄하하더니 투쟁이 확대되자 노조를 앞세워 당사자 동의도 구하지 않은 합의안을 들이밀며 무마를 시도했다. 용인기업을 해고하고,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막기 위해 온갖 탄압을 자행한 현대미포조선에 대한 투쟁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본에 이용당한 비정규직지회 선전물
또 하나는 용인기업지회가 1월 13일 낸 선전물 ‘일부단체의 홍보물 등 활동 자제, 외부간섭 없이 조기 마무리’ 등의 내용이었다. 회사 측은 기다렸다는 듯 용인기업도 외부단체의 투쟁을 거부한다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일부단체’란 현장대책위로 “조정으로 해고기간 임금을 생계비로 일부만 지급하자는 것이 회사의 악랄한 모습”이라는 내용의 선전물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과 회사측으로 추정되는 ‘굴뚝과 진실’(다음까페)은 “폐업으로 실직한 것이므로 최소한의 생계비 차원의 보상안 제시”라고 밝히고 있다. 현장대책위는 이를 우려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끄떡도 않던 회사가 투신에서 굴뚝으로 투쟁이 확산되자 조정을 들고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외부간섭’은 지역대책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대위 동지들의 열정적인 활동만큼이나 문제제기와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의 구심으로 우뚝 서고자 하는 민주노총이라면 그 의견들에 귀를 기울이고, 이견들을 조율하는데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노총은 다양한 이념과 의견이 공존하는 대중조직이지 특정 정파의 조직이 아닌 까닭이다.
물론 용인지회는 회사가 악용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 몸으로 연대한 동지들의 마음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에 회사의 악용을 우려해 정정하는 기자회견, 선전물 등을 요구했지만 용인지회는 금속울산지부로, 지부는 지회로 판단을 넘기다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빛나는 연대의 전통을 살리자
마지막으로 일부에서는 교섭에 힘을 실어야 한다며 현장대책위 활동을 중단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투쟁에서 확인했듯 자본은 하나를 양보하면 둘 이상을 내 놓으라 요구한다. 또 활동 중단으로 소강에 접어든 틈을 타 전선을 분열시키고, 맹공격을 퍼붓는다. 이는 현실로 확인됐고, 민주노총 대책위는 양보없는 투쟁을 선포했다.
요구가 모두 쟁취되진 못했다. 용인기업 동지들의 복직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미포 활동가들에게 닥칠 탄압도 예상된다. 굴뚝농성과 관련된 손해배상도 철회시키지 못했고, 자유로운 노조활동에 대한 확답도 없다. 투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끝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 만큼,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우리에게 부족하고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도 했다. 다시는 동지들을 외로운 절망으로 내몰지 않도록, 어용에 의해 현장을 잠식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때다.
그러나 노조마저 등 돌린 현장에서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몸소 실천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투쟁,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단결과 연대를 보여준 수많은 동지들이 이번 투쟁 승리의 주역이다.
마지막으로 굴뚝 위에서 이영도 동지가 보낸 편지글 중 일부를 싣는다.
“언젠가부터 사라진 노동자들의 빛나는 단결과 연대의 전통을 살려내는 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엄혹한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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