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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용산은 지지 않는다
운동 내부의 냉소?패배주의?무기력 넘어야 … 새로운 변혁의 봄을 꿈꾸자
지난 금요일 다시 문을 연 용산 4가, 남일당 참사 현장 바로 뒤편에 있는 레아 호프 2층에 앉아 이 글을 쓴다.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가게다. 일흔 하나. 이 동네에서 갈빗집만 30여년을 했던 평범한 서민이었다. 이상림 열사는 아들과 함께 망루에 올랐다. 아들 내외는 근처에서 노점상을 했었다. 장사가 안돼 2006년 부자가 돈을 모아 이곳 레아 호프를 열었다. 평생을 일했지만 인테리어 하고나니 돈이 없어, 전세도 못하고 월세를 주며 살았다. 생활집은 건물 4층 옥탑을 얻어 함께 살았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고소득 세입자들의 실제 모습들이다.
부자는 가족들에게 어딘가에 잠시 며칠 다녀온다는 말만 남기고, 망루로 올랐다.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였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상림 열사는 의문사를 당했고, 아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마저도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강제 구인되어, 방화치사로 구속되었다. 아버지를 아들이 방화를 해서 죽였다는 검찰 발표였다.
그 가게를 다시 열었다. 아래층엔 미술전과 만화전을 열고, 위층엔 현장 미디어센터가 들어섰다.
고 이상림 열사의 가게를 다시 열다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용산 참사의 진실은 잘 밝혀지지 않는다. 언론은 더 이상 용산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사람들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단 한차례의 추모 집회도 허가하지 않고, 모든 추모의 거리를 봉쇄하고 있다. 연대하는 촛불 시민들 70여명을 전문 시위꾼으로 찍어 연행하고, 범국민대책위 핵심 관계자들을 수배, 구속, 소환하며 전방위적인 공안 탄압을 펼치고 있다.
1980년 광주 이래 최대의 국가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일상 속에서 너무도 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고 있으니 이해도 된다. 850만 비정규직, 300만 청년실업자, 이미 고사 상태에 들어간 300만 농민, 밀려날 대로 밀려나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도시 빈민, 영세상인들.
이렇게 살아서도 죽은 목숨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이 공동묘지와 같은 사회에서 어느 누가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애도할 틈이 있겠는가.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외침을 들을 살아 있는 귀가, 눈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그런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려 있다고 생각했으면 저들이 단 하루만에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망루를 쳤겠는가. 하루도 안돼 유가족들의 동의도 없이 사체를 부검하고 사건을 은폐, 축소했겠는가.
한국사회는 거대한 공동묘지
그래서 더더욱 용산 참사의 진실을 밝혀 나가기가 힘들다. 저들의 탄압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년 전부터, 수십 년전부터 계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용산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면 이 숨겨진 구조들과 음모와 협작과 배후들을 건드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 평생 경찰서 출입 한번 해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생존권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최소한의 저항이 곧 체재전복의 불온 세력이 되어야 하고, 가장 절박한 목소리들이 테러리스트로 지목되어야 하는지, 상식적인 요구가 브로커들의 요구로 매도당해야 하는지. 그 드러나지 않은 뿌리들과, 머리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 현 단계에서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것은 오히려 우리 내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싸움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사실 저들의 예상된 대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냉소와 패배감이었다. 무기력이었고,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주의였다. 작은 사심들이었고, 합법주의에 갇혀 다른 창조적 행동을 기획하지 못하는 길들여진 의식들이었다. 가슴과 분노가 빠져버린 차가운 머리들이었다.
가슴과 분노가 빠져버린 차가운 머리들
이 투쟁은 철거민들만의 투쟁이어서는 안된다. 부문으로 설정될 투쟁이 아니다. 용산 학살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투쟁은, 항쟁은 이 땅에서 배제당하고, 소외당하고, 쫓겨나는 모든 이들의 투쟁이어야 한다. 자본의 이해를 위해 2년마다 쫓겨나야 하는 비정규직들이나, 건설자본과 가진 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언제나 쫓겨날 수 있는 철거민들이나, 또 그렇게 세계 곡물자본들의 이해를 위해 농토를 내놓아야 하는 농민들이나, 언론자유를 말살하기 위해 탄압받는 언론인이나, 일자리 하나 제공받기 힘든 청년실업자들 모두의 존엄이 걸린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이다. 이런 모든 일상적 학살의 정점에 구체적으로 생물학적 목숨까지를 빼앗은 용산 학살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우리가 외치는 모든 민주주의는, 변혁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삶과 목숨이 존중받는 사회를 향해 있다. 삶의 과정에서 소외받지 않고, 서로 고루 평등하며, 평화롭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그 단순한 소망이 가능치 않은 약탈을 위한 폭력으로 미친 사회지만, 우리는 꿈을 잃을 수 없다. 꿈마저 포기하고 나면, 희망마저 포기하고 나면 남는 건 기계적인 삶, 동물적인 삶, 살아서도 살아 있음을 느껴볼 수 없는 유령의 삶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혁의 봄을 위해
용산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쉽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한 공권력 타살이고, 타살에 대한 책임을 이명박 현 대통령과 정부가 져야 한다고.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가 가진 힘을 믿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양심을, 연대의 마음을, 저항을 믿어야 한다. 저들의 탄압과 폭력과 야만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현실이 된다고 믿어야 한다. 연대하는 것이 무작정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간다움을 확인해 나가는 벅찬 과정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난 3류 시인이다. 좋은 시는 쓸 줄 모르지만 꿈꿀 줄은 안다. 안 된다는 한계와 경계 너머에도 수많은 가능성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들을 본다. 물은 어디로든 흘러간다. 막히면 돌아가고, 도저히 안되면 땅 속으로 스며서라도, 증발해서라도 어디론가 흘러간다. 세상 모든 것들의 생명은 그렇게 쉬지 않고 움직이는 행동들이고 가능성이다. 불변하거나 영원히 막혀 있거나 닫혀 있는 것들은 없다. 생명의 본성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을 막으려는 노력은 부질없거나 부패한 것들이다.
다시 조금씩 움직이자. 불가능은 없다. 용산 참사의 진실을 향해 우리 모두가 조금씩만 움직이자. 아기 입술처럼 조그만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나 어느 순간 온 천지가 푸르른 봄이 되듯 우리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들을 모으면 새로운 항쟁의 봄, 변혁의 봄을 왜 만들지 못하겠는가.
이명박은 어쩌면 그런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송경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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