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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산별
비정규직이 짤리든 말든
[선거특집④-비정규직] 조직화도 투쟁도 희망도 잃은 비정규직 외면한 2년 6개월
금속노조 5기 집행부의 2년 6개월은 비정규직을 소외, 외면해온 시간들이었다.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은 현대차지부 사무실에는 백 수 십번도 더 다녀가면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사무실에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현대차 전주, 아산공장의 비정규직지회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12일 금속노조 중앙교섭이 전북에서 열리고, 현대차지부 전주위원회 대의원 간담회와 현장순회가 있었을 때 정갑득 위원장은 정규직 대의원들만 상대로 간담회를 했고, 당일 있었던 비정규직지회 교섭은커녕, 사무실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2009년 5월, GM대우차 노사가 정규직 전환배치를 통해 9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합의했을 때 금속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비정규직지회 간부들에게 정갑득 위원장은 “금속노조 지침을 위배하는 사업장을 다 징계해야 하느냐”고 했다. 금속노조 집행부는 비정규직이 짤리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비정규지회 사무실은 안 간다?
2008년 기륭투쟁 때의 일이다.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이 30일, 40일이 넘어가고, 촛불 시민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마지못해 집회를 배치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가 기륭투쟁에 연대하면서 만들어졌던 기륭공대위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까지 면담을 했는데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은 바쁘다는 이유로 끝내 만나지 못했다.
당시 기륭은 한 사업장의 비정규직 문제가 아닌, 비정규직의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핵심 문제였다. 기륭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뚫린다면 다른 사업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금속노조는 이를 전 조직적인 투쟁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4만 시절인 2006년 금속노조는 기륭, 하이닉스, 현대하이스코, KM&I 등 비정규4사의 투쟁이 장기화되자 대의원대회에서 3.15 연대파업을 결의했고 김창한 위원장이 26일, 전체 지부장단이 15일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단위 사업장의 문제로 금속노조 전체가 파업을 결의했고, 확대간부 파업에 이어 3월 15일 2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고, 5천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을 벌여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려내고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15만 금속노조는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연대와 투쟁을 하고 있다. 100일에 가까운 단식농성을 전개한 기륭 투쟁에서 금속노조가 보여준 모습은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 집회에서 있었던 일
지난 2009년 2월 11일 현대기아차그룹 본사인 양재동 집회 때의 일이다. 당시 금속노조 투쟁본부 회의에서는 당면 투쟁계획으로 비정규직이 집회신고를 내놓은 양재동 집회 안건이 올라왔고 집회 명칭에 비정규직 관련 내용을 삽입하자는 비정규직의 의견을 받아들여 비정규투쟁본부장 발언과 함께 ‘비정규직 우선해고 중단’이라는 내용이 집회 명칭에 들어가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 11일 당일이 되자 비정규투본 본부장 발언도 빠지고 대회 명칭에 비정규직 관련 내용만 쏙 빠져 있었다. 더 나아가서 비정규투쟁본부에서 하려는 실천투쟁조차 금속노조 실무자들이 “하지 말라”고 막아서는 상황이 발생해 전국에서 모인 300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고도 금속노동자 신문에는 비정규직 관련 대회명칭이 들어간 채로 집회가 진행되었다고 보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비굴하고 비참한 하루였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가 철저히 비정규직을 외면한 것이다. 이후 진행된 회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위원장의 구두 사과 말고는 선전물 내용조차 바꿔내지 못했다.
비정규직 임단협과 1사1조직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임?단협을 책임지고 지도하기보다는 거의 방치했다. 비정규직 임?단협이 금속노조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 진행하지 않고 각각의 단위에 맡겨놓았다. 비정규직의 현 상황이 자체적으로 임?단협을 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금속노조는 지부에, 지부는 금속노조에 서로 미루는 상황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정규직 임?단협이 정리되는 시점에 금속노조 실무자가 잠깐 참여해서 비정규직 임?단협을 마무리하는 행태가 몇 년 째 지속했다. 그러니 비정규직 교섭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지 않은가.
2006년 11~12월 금속노조 완성대의원대회서 하나의 사업장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무직 노동자가 하나의 조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1사1조직’ 규약과 사업이 결의된 바 있다. 대대에서 결의되고 결정된 사안을 힘 있게 집행해야 함에도 금속노조는 하부단위인 지부대대에서 논의하는 것을 방치함으로서 산별노조로서 위상의 실추는 물론 이후 1사 1조직이 실현되는데 어려워지게 만든 주범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해당단위의 결정에 따른다’는 단서조항을 달면서 정규직에게 논란의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완성 대대 자리에서 ‘해당단위’라 함은 ‘비정규직과 사무직’이라고 명확히 설명이 되었던 내용이었다. 그러함에도 현대차지부에서 1사 1조직의 조직편제 건을 대대 안건에 올림으로서 논란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부결이 되면서 1사 1조직은 난항에 봉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속노조는 본조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게 되고 만다. 1사 1조직은 미조직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고 더구나 산별의 정신으로도 반드시 1사 1조직은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데로 금속노조가 하부단위인 지부들의 눈치를 보며 미적거리는 사이 1사 1조직은 더더욱 어렵게 되고 말았다.
비정규직 외면하는 중앙교섭
4만 금속노조 시절 중앙교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비정규직 요구안을 쟁취했었다. 2004년에는 법정최저임금보다 6만원 이상 많은 금속산업 최저임금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합의를 했다. 2005년에는 당시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었던 △불법파견 노동자 정규직화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 등을 내걸었고, 휴가를 코앞에 둔 7월 15일까지 6일간의 중앙교섭 파업을 벌여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온전하게 쟁취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6년에도 사내하청 노동자 처우개선과 최저임금 67,630원 인상 등을 따냈다.
그러나 15만 금속노조가 출범한 이후인 2007~2008년 중앙교섭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합의일 뿐이었다. 2007년 중앙교섭에서는 비정규직포함 총고용보장은 합의하지 않는 것만 못한 ‘노력한다’로 끝났고, 2008년 비정규직 5대 요구안은 단 한 가지도 따내지 못했다. 2009년 중앙교섭 역시 비정규직 요구안을 만족스럽게 따낼 가능성은 전무하다.
비정규직을 조직화해서 30만 산별노조를 만든다는 공약은 고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절망감과 배신감만을 심어준 2년 6개월, 기나긴 고통의 터널이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시간들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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