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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에 대한 불신은 안돼
[독자편지] ‘노동운동 길을 묻다’ 노중기 교수 인터뷰를 읽고 … 4대강 총파업 가능
노중기 교수의 "노동운동 길을 묻다"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다. 노교수는 궁극적으로 노동운동이 정치적 노동운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의한다. 노동운동이 노동조합 자체에 매몰될수록 우리는 자본의 통제와 제한에 발이 묶일 것이다. 예컨대 쌍용차가 파업할 때 다른 사업장, 다른 지역 노동자들이 "나 몰라라" 하는 관행이 당연시될 것이다. 이것은 계급운동의 완전한 후퇴다. 따라서 산별운동은 이런 기업별노조의 단점을 극복하고 계급적,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노중기 교수의 방향에 대해선 동의하지만 몇 가지 현실인식에 대해 강조점을 다르게 둬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구조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교육, 의료, 주택 등 조합원의 정치의식이 높아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가식적 정치파업이 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노교수는 "가식적 총파업"의 정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치파업으로 자본을 위협하고, 내용적으로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운동 양태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한미FTA와 같은 정치투쟁이라는 슬로건으로 자본을 위협하고, 현장에서 경제적으로 타협하는 방식"의 총파업이 가식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돼야 할까? 노동자들이 단기적 이익 - 즉각적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 - 이든 중장기적 이익- 장기적인 고용안정 및 노동조건의 안정화 -을 위해 싸울 수 있고, 싸워야 한다.
물론 노동자투쟁이 가장 첨예한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은 단지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 쟁취에만 머물지 않는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자체의 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지라도 투쟁에 완전히 몰두하기도 한다. 맑스는 이를 "대자적 계급의식"이라고 불렀다. 계급운동 역사상 1917년 러시아혁명, 1968년 프랑스 혁명 그리고 한국에서는 1987년 대투쟁 경험이 이에 준한다.
노동자들은 이러저러한 계급투쟁의 경험을 통해 자본가계급과 달리 노동계급 고유의 동질성과 잠재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더라도 말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치유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로 보는 순간 전혀 다른 실천적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데 있다.
시기적, 현상적 문제를 구조문제로 몰아넣어버리면 노동자들의 역동적 변화를 전혀 고려치 않는 기계적, 고정적 사고에 갇히게 될지 모른다. 이는 잘못하면 노동자계급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노동운동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왜 "노동자는 안 돼"라며 떠났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상이 어떨지라도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 존재가 노동자 의식보다 선행한다. 의식이 존재에 많은 영향을 미치더라도 말이다.
두 번째는 실제 현실에 정치적 투쟁에 나서기를 꺼리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다. 노교수의 지적처럼 현장활동가들의 인식 전환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로 실천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끊임없는 교육과 선전을 하는 것과 동시에 실천적으로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하는 것 모두를 필요로 한다. 이 얘기는 거꾸로 "뻥파업"도 나름 의미 있는 것이 아니냐는 제기를 할 수 있다.
"뻥파업"의 문제점은 현장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하지 않고 지도부의 "생색내기 말로만 파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장노동자들과 충분한 토론과 소통이 이뤄진다면 나는 여전히 "뻥파업"이 아니라 정치파업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조 지도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일상적 조직활동을 하는 현장활동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현재 노동3권을 위협하는 전임자임금지급,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문제와 4대강 사업 폐기 등을 위해 현장노동자들을 조직해 총파업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서울지부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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