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배타적 지지”의 아이러니
1.
이번 총선을 겪으면서 문제가 된 ‘배타적 지지’ 결의는 지난 2000년 민주노총 정기 대대에서 처음 결의되었지만, 이후 별도의 갱신 결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현 민주노총 중앙지도부는 8년 전 민주노총의 결의를 근거로 산하 조직에 행동통일을 강제하였다. 이런 지도부의 등쌀에 노동운동 일선 사업장 지도부들은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들이 평상시 투쟁사업 선동을 그런 열성으로 강제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어떻든 일선 단위사업장 지도부는 이미 배타적 지지가 불가능하게 조합원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있는데 마냥 지침을 따를 수도, 그렇다고 중앙 지침을 거절할 수도 없는 난감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노당에 올인했던 총선은 끝났다.
그럼 앞으로 배타적 지지는 어찌되는가?
나는 혼란스러울 땐 무조건 원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2.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다.
대중조직이므로 그 정의상 누구든 노동자이기만 하면, 즉 “노동조합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연령, 정치적 신념, 학력, 습득된 숙련의 정도 등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이기만 하면 누구든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조직”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하여 조합원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정치조직에 “배타적 지지”를 하는 것은 노동자 대중조직의 조직원리에는 맞지 않다.
그런데 왜 당시에는 이런 결의가 통과되었을까?
국민승리21로 97년 대선에 참여할 당시나, 득표가 부족하여 당이 해산한 후 재차 민노당으로 창당하는 2000년만 해도 지금의 민노당 다수파인 이른바 자주파들 대부분은 민노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김대중 정부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생 진보정당인 민노당이 자리잡으려면 우선 자주파들의 “비판적 지지”경향을 넘어서는 조직적 기반이 필요하였다. 그런 일환으로 당시 당 대표였던 권영길 대표가 민주노총에 요청하였고, 당에 먼저 참여하여 당원이면서 민주노총 내에 일정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이른바 평등파 쪽에서 동조하여 통과시킨 것이 “배타적 지지”결의였다.
그 후 사정이 일변하여 이른바 “9월 테제” 지침에 따라 자주파들이 대거 민노당 입당을 추진하였다. 02년부터 입당러시가 본격화되고, 이후 03년-04년에 걸쳐 전국 모든 당 조직의 당권을 이들이 장악하였다. 그 이후 모든 당내 의결단위는 6대4 내지 6.5대3.5의 구조로 변하였다.
3.
07년 4-5월 민노당의 대선 후보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당내 대립이 있었다.
자주파들 상당수가 민중경선제를 해야한다고 요구를 하였다. 당시 경선 상황은 노회찬, 심상정 후보가 이미 출마를 선언한 상태였지만 자주파 진영에선 내부적으로 의사결정이 되지 않아 미적거리는 상황인데, 아마 민중경선제라는 이름으로 당 외부의 지지를 조직하면 자주파 정파수장들이 힘을 더 얻을 수 있을 듯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영희 정치위원장은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수차례 걸쳐 민노당을 압박하여 민중경선제를 통과시키려 애를 썼다.
그러나 뜻밖에 민노당 대대에서는 민중경선제가 부결되었다. 심,노 지지층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진성당원제에 대한 당원들의 자부심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그 이후 자주파는 직접 자기정파 수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권영길을 후보로 내정하였고, 그간 자주파 내부의 동향을 살피고 있던 권은 6월경에야 후보등록을 하고 경선에 참여하여 후보로 선출되었다.
4.
평등파의 협조로 결의되었으나 자주파 민주노총 지도부가 당을 협박하는 소재로 이용하던 그 “배타적 지지”가 이번 총선에선 진보신당의 노동자 후보들을 배제하는 논리로 동원되었다. 참으로 “배타적 지지”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배타적 지지”를 핑계로 조합원인 진보신당의 후보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도 진보신당 운운하면 제명하겠다는 극언도 나왔고, 실제로 회의석상에선 간부들 중 진보신당 지지를 표명하면 징계하겠다고 공공연히 협박이 있었다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조직의 지도부는 맘대로 말해도 되지만 조합원은 말 못하게 한다면 그게 민주노조일까? 위원장은 맘대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고 해도 되고, 조합원이 언급하면 분열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징계에 내몰리는 조직이 민주노조인가? 우리가 한국노총 어용노총을 박차고 튀어나와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만들었을 때, 그 조직은 위원장 맘대로가 아니라 조합원이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을 만들자는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석행 집행부는 조합원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고 있다.
이석행 집행부의 이런 처사는 대중조직 지도부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한 채 철저하게 정파 지도부를 자임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대중조직의 조직원리에도 맞지 않는 정치지침을 강제하여 조합원 위에 군림하는 권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역대 민주노총 지도부 중 최악의 집행부라는 평가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5.
선거는 끝났다. 그럼 “배타적 지지” 어떻게 해야 할까?
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폐기해야 한다.
먼저 대중조직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방침이다. 노동조합은 “정치적 신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이기만 하면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조직”이다. 우리 운동사의 특수한 시기 특수한 조건에서 1회 결의된 내용을 빌미로 조직의 지도부가 조합원을 강제해선 안 된다.
또 이런 원론과는 별도로 현실적으로도 많은 조합원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강제하다간 오히려 조직만 분열된다.
다음으로 “배타적 지지”를 폐기하면 한나라당도 지지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운동의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다. 노동자정당 운동과는 별개로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운동원리에 의해서도 한나라당 지지를 표명할 수 없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방침을 갖고 있는 한 자본과 정권에 자주적 운동을 표방한 민주노조 진영이 운동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노동자 정당이 없을 때는 노동조합의 정치방침이 없었나? 노동자 계급정당을 표방한 모든 정당에 지지를 열어두는 것이 노동조합의 원리상 올바른 정치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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